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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 당하지 않으려면

[김성회 온고지신 리더십]토사구팽 당하지 않으려면

등록 2019.07.15 09:25

수정 2019.08.29 10:02

토사구팽 당하지 않으려면 기사의 사진

2인자 리더십은 리더십의 절정이다. 팔로워십과 리더십의 불꽃튀기는 접점이 바로 2인자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2인자 리더십은 꼭 넘버2가 아니더라도 조직에서 상사의 신뢰와 부하의 존경을 함께 받아야 할 중간관리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과 통한다.

세컨드 바이올린은 음을 리딩하는 퍼스트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에 맞춰서 때로는 따라가기도 하고 때론 보완하기도 하면서 보다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비록 1인자는 아니지만 1인자 혹은 리더와 함께 어울려 때로는 그의 모자란 음을 채워주고 그와 다른 성부의 음을 내어 화음을 만들어주는 파트너가 바로 진정한 2인자다.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는 자신의 묘비에 “여기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고용할 줄 아는 한 남자가 잠들다”라고 썼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카네기처럼 통 큰 상사가 있는 경우도 드물다. 또한 여기엔 ‘상사보다 실력에서 낫긴 하되, 태도에서 절대 복종하는’이란 괄호안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토사구팽, 후생가외 모두 능력 있는 부하들에 대한 두려움과 그 견제를 담은 말 아니겠는가.

‘토사구팽(兎死狗烹).’ 교활한 토끼를 잡고나면 충실한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져 삶아 먹힌다는 말은 바로 신하의 위험성과 불안정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토끼이면 중용될 수 없고, 사냥개이면 용도를 다한 후 삶아 먹히는 게 2인자의 운명이다. 역사에서 팽(烹)당하지 않는 2인자참모들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좋은 리더를 선택하라:관중과 위징
인생 오복중의 가장 큰 복은 상사 복이다. 제환공과 관중, 당태종과 위징은 팽 당하지 않고 군신간에 해피 앤딩을 맞은 흔치않은 경우다. 공통점은 훌륭한 리더를 만났다는 점이다. 관중은 자신이 모시던 공자 규를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훗날 제환공이 된 공자 소백에게 화살을 쏘아 죽이려고 했다.

또 위징은 태종 즉위과정에서 반대편에 섰다. 황태자 이건성에게 이세민(당태종)을 독살해 제거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권유했던 인물들인데 중용돼 날개를 폈다. 새가 나무를 택하지, 나무가 새를 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은 참모로서 큰 행운이다. 관중, 위징 모두 황제 즉위전 반대편 진영에서 죽음을 모의한 인물인데도 중용된 것은 리더의 그릇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새기게 한다. 만일 이런 리더를 만나는 천운이 없다면 다음의 플랜B를 강구하는게 답이다. 자신의 리더가 이런 급이 아닌데도 직언불사나, 100퍼센트 인정 불변을 믿는 것은 만용이다.

둘째,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라:주공
좋은 사이일 때는 어떻게든 살 방법을 마련하고, 나쁜 사이가 되면 어떻게든 죽일 논리를 마련한다. 이는 이성간이나, 붕우간, 군신간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다. 믿음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 신뢰관계라 해서 계속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다. 위기에 대비하라는 것은 1인자-2인자간 신뢰관계에도 적용된다. 관계가 깨졌을 때 충정을 증명할 구체적 물증을 마련해놓아 회복한 인물의 예는 주나라의 명재상 주공이다. 주공은 공자도 존경해 롤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다.

주공은 조카 성왕이 어려 섭정을 하면서 여러 가지 모함과 질시에 휘말린다. 그래도 묵묵히 섭정을 하며 국가를 궤도에 올려놓지만 주위 권신들은 그를 나무에 올려놓고 흔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급기야 조카인 성왕도 삼촌인 주공이 왕위를 노려 반역할 거란 말에 흔들려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때 주공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홀홀히 떠난다.

이때 몇몇 신하들이 성왕에게 권해 꺼낸 옛 문서가 주공의 혐의를 푸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즉 성왕이 어렸을 때 병에 걸려 위독했을 때 하늘에 빌었다는 기도문이 그것. 성왕이 병에 걸려 위태로워지자 주공 단은 스스로 손톱을 잘라 하수에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께서 아직 어려 아는 것이 없기에 제가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허물이 있다면 제가 그 재앙을 받아 대신 죽겠습니다.” 즉 대신 죽음까지 불사하겠다는 충성서약서를 발견하고 성왕은 참회하며 주공을 온갖 예를 갖춰 불러들인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덧붙인다. 왜 하필 그 시점에 그 문서를 읽도록 누가 권했는지, 주공이 마련해놓은 모종의 위기대비 시나리오가 아닌가 해서다. 어쨌든 그것이 없었다면 주공의 성왕과의 신뢰회복은 힘들었을 것이다. 좋을 때 그 신뢰가 계속 가리라고 안심은 금물이다. 충심을 증명할 구체적 물증과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관계회복 내지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박수칠 때 떠나라:범여
토끼를 잡았으면, 목표를 이루었으면 팽 당하기 전에 떠나라.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범여가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에게 20년간의 복수혈전 끝에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킹메이커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이란 말은 흔히 한신이 유방에게 역적으로 몰려, 왕에서 변방의 제후로 강등 당하자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을 처음 한 이는 범여다. 범여는 월나라 구천과 20여년간 고난을 같이 했다. 군신을 떠나 복수혈전을 함께 한 동지였다. 정작 목표를 이루자, 범여는 주어진 상과 벼슬을 미련 없이 버리고 구천을 떠난다.

범여는 동료인 문종에게 구천의 관상을 이렇게 말한다. “고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관상에 빗댄 인물평이지만 사실은 인생역정을 보며 판단해 내린 인과론이다. 구천은 철천지원수인 오나라 왕 부차의 노예가 돼 똥까지 맛보며 건강을 염려하는 충성을 가장해 복수를 한 인물. 충성을 가장해 뒤통수를 친 자신의 인생역정상,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할 수 없고, 늘 측근의 배신에 대해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범여는 동료인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 구천을 떠날 것을 충고한다.

하지만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며 타이밍을 놓친다. 결국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고 자결한다. 범여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장사를 해 거부가 됐고, 그것이 소문나 재상을 3년간 했다. 그때도 범여는 또 한번 재상을 자발적으로 그만둔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재상도 하였고 재물도 많이 모았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좋은 징조가 아니다”라며 관직을 내놓고, 재물도 나눠준 후 산속으로 들어갔다. 부와 권력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인데, 이 두 개를 모두 가진 것만으로도 질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팽을 시쳇말로 ‘헌신하다 헌신짝됐다“고 한다. 공동 목표를 이루고서 끝이 안좋은 경우가 많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음은 떠날 타이밍을 안다는 말과 통한다. 내려놓음의 미덕은 팽당하지 않는 확실한 예방책이자 지혜다.

넷째, 상사의 견제심리, 즉시즉시 풀라:소하.
리더는 2인자를 늘 견제하고 경계하게 돼있다. 상사의 관용과 인정에만 기대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다. 욕심이 있는 부하는 내치면 그만이지만 인심이 몰리는 부하는 명분도 마땅찮고 리더로선 속만 끌탕이 되기 십상이다. 이럴 때 2인자가 인기를 끌수록 리더의 경계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2인자는 의심을 그때그때 푼다. 리더의 진심을 읽고 의도적으로 자작극(?)을 벌여서라도 흠을 만들어 민중의 인기를 깎는다.

군주와 사이가 내내 좋았던 대표적 군신은 한고조와 명재상 소하다. 그 비결은 군주의 폭넓은 아량, 하해와 같은 관용 때문은 아니었다. 리더의 불안한 견제심리를 읽어 미리 대비하는 처세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인격과 능력을 갖춘 부하는 부담스럽다. 특히나 자기의 빛을 가릴 정도로 인심이 결집될 때 경쟁심을 가진다. 욕심 많은 부하는 뒤통수를 칠까봐 경계하지만, 인심이 모이는 부하에 대해선 질투심리로 뒷골이 당긴다.

알다시피 유방은 천하통일을 한 후 한신, 경포 등 공신을 대거 숙청했다. 유방은 ‘자신이 용인술의 대가였기 때문에 항우에게 승리했다’고 고백했지만 정작 대업을 달성하자 공신들을 거의 모두 용도폐기했다. 그 와중에서 소하가 팽 당하지 않은 비결은 무엇인가. 이는 리더가 ‘사냥개’가 아닌 ‘사냥꾼’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비되는 인물은 한신이다. 그는 한신은 늘 자신의 성과를 과신, 평가와 보상만 바라다가 큰코다친 경우다. 수치(數値)는 중요하지만 수치만 믿다간 수치(羞恥)를 당한다는 실례다. 반면에 소하는 과거의 성과나 신뢰에만 의존하지 않고 늘 현재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과연 소하는 어떻게 유방의 의심에 대처했을까. 유방은 전쟁으로 왕이 되기 전이나, 된 후에도 밖을 돌아야 했다. 행정-재무-내무의 국정 총책임을 소하에게 맡기니 믿음직스러운 한편 의심스러울 수도 있었다. 소하의 대비책은 잦은 보고였다. 그는 종묘, 사직, 궁실관련 여러 사항들을 보고하고 허락을 얻어 일을 처리했다. 보고를 올릴 경황이 없으면 먼저 알아서 시행한 후라도 나중에 돌아왔을 때 반드시 보고했다. 상사 패싱이야말로 의심의 근원이다.

다음으론 본심을 읽은 것이다. 유방의 의심은 이런 보고만으로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전쟁중 후방물자가 늦게 도착하자, 담당자인 소하를 독촉하거나 책망하긴 커녕 그 와중에 오히려 소하의 공로를 위로하는 위장전술로 마음을 떠본다.

소하는 본심을 읽고선 자손들 중 장정들을 모아 최전방에 참전시켜 유방을 돕게 한다. 이후에도 음흉한 마음 떠보기는 계속됐다. 중원 통일 후 유방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며 소하를 상국으로 임명하고 5천호를 더 봉하고 병졸500명의 호위대를 같이 하사한다. 소하가 누구인가. 이것 역시 덥석, 냉큼 받지 않는다. 당시는 한신이 반란을 일으켜 유방이 신경이 날카로운 때이기도 했다. 식읍과 호위대등 하사품을 모두 사양하고 모든 가산을 황제의 군비로 사용케 해 의심을 풀었다. 충성은 말이 아닌 행동, 물질적 희생으로 표현해야 증명되는 법이다.

소하는 이 같은 대응책을 넘어 명예희생의 자해극을 벌이면서까지 황제의 의심을 풀고자 했다. 유방이 공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러 전쟁에 나설 때 일이다. 유방은 전쟁에 나가서까지 끊임없이 서신을 보내 소하의 근황을 체크한다. 소하가 내정을 착실히 해 인심이 모이는 것을 꺼리는 마음에서였다. 소하는 그 마음을 알고는 백성들의 욕을 먹을 만한 자해극(?)을 벌인다. 백성들의 땅과 집을 싼 값에 사들여 욕먹을 일을 자초하는 것. 유방이 반란군 진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소하를 성토하니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유방은 백성들의 원망에 은근히 기뻐하며 “상국(소하)는 백성에게 사죄하라”고 말한다.

실제 소하는 땅과 집을 외딴곳에 두고 담장도 없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런 것을 보면 백성들의 집을 싼값에 사들여 부정한 폭리를 취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명성을 훼손시켜 황제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대의 시점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물론 없을 것이다. 단 ‘공은 리더에게, 과실은 참모에게’의 마음으로 인기를 가리는 태도는 여전히 시사 포인트다.

한비자는 일찍이 “군주와 신하는 하루에도 여러번 싸운다. 기본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라며 충성에 의지하지 말고 충성할 동인을 만들라고 했다. 이는 역으로도 성립한다. 2인자는 1인자의 인정과 지지에만 의지하기보다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거리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토사구팽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2인자 역사적 인물들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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