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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등록 :
2019-09-03 09:54

[배철현의 테마 에세이]승화(昇華) ⑨희생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아홉 번 째 글의 주제는 희생(犧牲)이다.


희생(犧牲) ; 나의 성스러움을 정성스럽게 배치하는 것

2019년 9월이 시작되었다. 아침 산책길에서 본 벼 이삭들이 지난여름 작열하는 태양 열기와 소나기를 머금고 이윽고 낱알들을 충실하게 창조하였다. 이젠 지난봄에 이들을 모종한 인간의 추수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 만물은 자신이 그 순간에 취해야할 몸가짐을 안다. 그 행위는 자연스럽기 때문에 언제나 감동이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자연스런 행위다. 벼들의 이런 행위는 인간들의 생존을 위해서 희생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벼들의 자연스런 행위이자 의무다. 희생이란 단어를 소극적이며 부정적으로 사용하면, 누군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폭력이다. 그러나 희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과 명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행위다. 지난주 금요일 ‘희생’이란 단어를 각인시켜준 소중한 사건을 경험했다.

이 경험은, 우연이지만, 지나고 보면 필연이었다. 한 낯선 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인생을 살다보면 본능적으로 반드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 그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도, 혹은 그전에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더라고 운명적으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 지난 7월 말 소셜 미디어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한 분이다. 필자가 매일 올리는 ‘매일묵상’글에 그가 댓글을 남겼다. 댓글에 진심眞心이 있었다. 진심은 상대방이 우연히 던진 말, 표정, 혹은 몸짓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최전방 DMZ에서 지난 20년간 근무하고 있는 장정법 소령이다. 장 소령은 ROTC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령까지 진급한 사람이다. 나는 지난 금요일(2019년 8월 30일) 아침 일찍 그를 만나고 있었다. 나는 해병대에 지원하고 싶어 일주일에 9시간씩 수영을 연습하는 고등학교 1학년 조카와 동행했다. 우리는 가장 신나고 유익하고 감동적인 하루를 경험했다. 하루가 이렇게 보람되다면 인생은 살만하다고 느꼈다. 하루방문이지만, 화려한 유럽 도시방문보다, 네팔의 에베레스트 산 등반보다 나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든 인생의 경험이었다.

우리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25보병사단 내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았다. 자연은 지난 66년 동안,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존재하는 비무장지대를 지상에서는 그 유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유토피아Utopia로 전환시켰다. 유토피아란 ‘지상에서는 없는(u) 장소(topia)’라는 말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일궈놓은 정원이 아닌, 자연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손수 만든 기상천외한 장소다. 인간의 인위人爲는 자연의 무위無爲를 넘볼 수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민간통제선 안에 위치한 전초前哨라고 불리는 GP에서 본 DMZ는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내 시야視野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기증이 났다. 그 풍광風光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무섭기도 하고 동시에 다정하기도 하고, 환희에 차 있기도 하고 한없이 슬프기도 한 장소다. 그런 경우, 눈물이 반응한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DMZ 평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어휘를 동원해도 형용이 불가한 장소다. 끝없이 펼쳐진 연두색평원에 검푸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나무 사이로 실개천 같은 강이 남북南北의 경계를 함부로 넘나든다. 내가 눈으로 이 광경을 목격하였으나, 그것을 인지하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한,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진 장소였다. 내 경험이 미천微賤하여, 내가 말로 그 신비神祕를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은 내가 목격했던 그 이미지를 마음 속 깊은 곳에 심어, 언젠간 그 싹이 돋아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오래전 본 15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린 충격적인 그림 <자상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가 떠올랐다. DMZ의 경치를 이해하면, 보쉬가 왜 에덴동산을 그렇게 그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는 오전엔 DMZ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임진강 옆에 있는 파주 적성면 설마리에 위치한 한 추모공원으로 갔다. 이곳도 영국군들을 위한 추모공원일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도로 옆 후미진 곳에 태극기, 유엔기 그리고 영국기가 펄럭이며 우리를 을씨년스럽게 반겼다. 제법 잘 갖추어진 추모공원이다. 장 소령은 이곳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었다. 한국인들이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이곳은 6.25전쟁 때, 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3개 격전지들 중 한곳이다. 영국군 28연대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연대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인 역사적인 격전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길이 35m 추모의 벽에는 전사자와 실종자 부대원 869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 앞에는 전사한 할아버지를 위해 영국에서 온 이름 모를 소녀의 화환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이 영국청년들은 알지 못하는 땅, 대한민국에 와서, 개인이 지닌 가장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내놓았을까? 추모 벽엔 이름과 함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앞으로 중앙에는 5톤 청동주물로 만든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의 상징인 베레모 조각상이 전시되어있다. 이 베레모에는 글로스터셔 연대 상징인 ‘스핑크스’ 모형도 함께 조각되었다. 스핑크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니는 괴물이다. 삶과 죽음, 문명과 야만, 자유와 억압의 경계에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자들의 심정을 담았다. 이 추모공원 오른편엔 완정군장을 하고 베레모를 쓴 일곱 병사들의 청동 조작상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시켰는가?

한국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1951년 4월 22일 2만7000명 규모의 중공인민지원군 3개 사단이 총공세를 펼쳤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개입으로 수도 서울을 빼앗기자, 서울을 다시 탈환하기 위해 임진강 지역을 거쳐 서울로 진격할 참이었다.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는 이 전략적인 요충지를 수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만이라도 중공군들의 진격을 지연遲延시킨다면, 유엔군이 서울 사수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스터셔 부대원들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중공군들의 파상공세를 지연시켰다. 특히 글로스터셔 연대의 제1대대는 235고지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글로스터셔 부대원 750명 가운데 16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526명이 포로가 됐다. 이들은 모두 6주간 도보로 이동하여 압록강 변에 위치한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2년 이상 감금되어 처참하게 생활하였다. 상상해 보았다. 내가 낯선 땅에 가서, 그곳의 국민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을까? 영국은 한국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8만7000명을 파병하였다. 나는 이들 중 1109명이 숨지고 2674명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숙연해 졌다. 영국청년들의 사망자 유해 800기는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에 안장되어있다.

하버드 대학의 중심은 야드 안에 있는 와이드너 도서관과 그 정면 앞에 있는 ‘메모리얼 처치’The Memorial Church다. 대학의 모든 중요한 행사는 이 메모리얼 처치에서 거행된다. 그 안 벽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나는 맨 처음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인류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리더나 노벨상을 탄 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 상상력은 오산이었다. 빽빽하게 벽을 메운 이름들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유럽에서 목숨을 잃은 373년의 학생들이다. 그 후 교회 안 쪽 벽에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학생들의 이름도 새겨져있다. 한국전쟁에서 22명의 학생들이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선진국은 다른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전사한 자들을 가장 존경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최고 가치인 자기희생自己犧牲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경쟁에서 살아남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숭고한 가치를 위해 용감하게 희생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연습이다.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은 DMZ와는 또 다른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이 협곡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파친 파란 눈의 영국 청년들을 상상해보았다. 왜 이들은, 그전에 나라이름을 들어본 적인 없는 대한민국의 임진강 유역 설마리 협곡으로 와, 목숨을 바친 것인가? 예들 들어 내 자식이 아프리카의 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수가 있는가? 나를 포함한 대부분 부모들은 그런 파병을 반대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 영국 군인들처럼, 자원해서 조국이 아닌 이름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가?

장 소령은 매년 4월이면 이곳에서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예배를 드린다고 말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살아남은 영국인 노병들이, 자신의 생활비를 아껴, 자신들의 최선을 바친 설마리 계곡으로 온다. 이들은 휠체어를 타고 자신의 자녀, 손주들과 함께 와서 예배를 드린다. 영국에서 글로스터셔 연대 군악대와 대장, 그리고 영국대사가 참여하여, 자신들의 희생을 고귀함을 상기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 전투가 비록 중공군에서 함락되어 패한 전쟁이지만, 이들의 서울진군을 지연시켜 수도를 방어하고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결정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생존한 80대 노병들은 왜 이곳에 손주들을 데리고 머나먼 영국에서 오는가? 왜 글로스터셔 군악대와 영국대사는 매년, 이 추념행사를 가장 소중한 의례로 준수하는가?

<요한복음> 15.13에 예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노병의 사랑은 예수가 말한 사랑보다 훨씬 크다. 그들은 자신이 그전에 알지도 못하던 한국이란 땅에서 중공군과 북한에 의해 공산화될 위기에 처한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인 고귀한 생명을 기꺼이 희생시킨 것이다. 노병에게 한국전 참전은 가장 위대한 가치인 사랑의 실천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고귀한 희생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할 최상의 가치라고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추모공원 좌측에 서로 다른 크기의 세 개의 문들이 포개져 전시되어있다. 첫 번째 조형물 상부 난간에 FREEDOM FRIENDSHIP PEACE라고 적혀있다. 이 영국청년들은 ‘프리덤’FREEDOM 즉 ‘자유自由’를 목숨을 바쳐도 아까지 않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내가 자신의 힘으로 행복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유라는 권리야말로, 인간이 지닌 최고의 가치다. 그러나 자유가 나만 자유롭게 만들고 타인을 억압한다면, 그것을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자유를 만끽하는 만큼, 나의 친구도,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지구저편에 있는 이름 모를 ‘친구’도 자유를 누려야한다. 그것이 ‘프랜드쉽’FRIENDSHIP 즉 ‘우정’이다. 이 영국청년들은 예수가 말한 명령 이상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친구의 범위를 동료 인간으로 확장하여, 낯선 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온다. 그 행복이란 바로 ‘피스’PEACE 즉 ‘평온함’이다.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 타인이 불편하면 나도 불편하다. 그것이 ‘평화’다.

‘희생’이란 영어단어 ‘새크리파이스’sacrifice의 어원은 의미심장하다. ‘거룩한 행위’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단어 ‘사크라’sacra와 ‘정성스럽게 배치하다; 만들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파체레’facere의 합성어다. 희생이란 자신의 성스러움을 정성스럽게 배치하는 행위‘다. 2019년, 가을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9월 첫 주일,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전부를 바칠 것인가? 나의 희생은 이기적인가 아니면 보편적이며 이타적인가? 설마리 협곡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869명 영국청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설마리전투추모공원


<필자 소개>
고전문헌학자 배철현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하였다. 인류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다리우스대왕은 이란 비시툰 산 절벽에 삼중 쐐기문자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에 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류가 남긴 최선인 경전과 고전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책을 썼다.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성서와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성서는 인류의 찬란한 경전이자 고전으로, 공감과 연민을 찬양하고 있다. 종교는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하려는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빅히스토리 견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하였다. 이 책은 빅뱅에서 기원전 8500년, 농업의 발견 전까지를 다루었고, 인간생존의 핵심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혹은 기술과학 혁명이 아니라 '이타심'이라고 정의했다. <심연>과 <수련>은 위대한 개인에 관한 책이다. 7년 전에 산과 강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여 묵상, 조깅, 경전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블로그와 페북에 ‘매일묵상’ 글을 지난 1월부터 매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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