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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昇華) ㊵ 대담

[배철현의 테마 에세이] 승화(昇華) ㊵ 대담

등록 2020.05.25 09:29

 승화(昇華) ㊵ 대담 기사의 사진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국민 한명 한명이 선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후에 나비가 되듯이, 인간은 과거의 자신을 직시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마련한 고치에서 변신을 시도해야한다. 그 변신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이다. 필자는 그 개벽을 ‘승화’라고 부르고 싶다. ‘더 나은 자신’을 모색하는 마흔 번째 글의 주제는 ‘대담’이다


대담(大膽) ; 모는 옆에 있는 다른 모에 의지하지 않는다

며칠 전 불어 닥친 돌풍突風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2층 베란다에 놓았던 테이블 의자가 스스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바닥에 내동그래졌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당 능수벚나무 잎들이, 마치 강풍에 날리고 펄럭이는 처절한 연 꼬리처럼, 줄기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젠 내년 4월에 피울 꽃을 상상하며 침묵모드로 들어간 목단牧丹도 강풍을 맞이하여 가지 몇 개를 힘없이 부러뜨렸다. 돌풍은 깊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압도적이다.

바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 <에누마엘리시>Enuma Elish에서 우주에 질서를 가져왔다. 바람은 최강의 무기武器다. <에누마엘리시>는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쐐기문자 아카드어로 기록한 기원전 19세기 문헌이다. 당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없음’이라는 개념을 아직 떠올리지 못해, 혼돈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즐기는 도시문명과 그 문법인 ‘질서秩序’를 바람으로, 그 반대상태인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는 ‘혼돈混沌’을 바다라고 상상하였다.

아르메니아 산지에서 출발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남쪽 80km에 위치한 바빌론 근처에서 거의 근접한다. 거기서 아래 페르시아만으로 가는 이 강물들의 깊이는 얕아, 이 강들은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흐른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때때로 페르시아만에서 역류逆流로 올라온 염수塩水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든 담수淡水와 섞이는 엉망진창을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 상태로 상상하였다. 그들은 담수에 스며있어 자신들에게 농업과 어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압수’Apsu라고 불렀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바다에 깃든 파과적인 힘을 ‘티아맛’Tiamat이라고 불렀다. 티아맛은 용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바빌론이란 도시와 우주에 질서를 가져올 젊은 ‘마르둑’Marduk신은 바닷물인 티아맛을 네 가지 강력한 바람을 일으켜 제압한다. 바람은 혼돈보다 ‘더 강력한 혼돈’으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자다.

나는 그날 농부가 심은 논밭의 모들이 강풍에 휩쓸리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농부는 지난 며칠 동안 모심기 기계인 이앙기를 타고 논밭을 여러 차례 왕복했다. 그는 이앙기 뒤에 모판을 실고 물대기를 통해 부드럽게 만든 논에 모를 심었다. 이앙기가 1960년대 일본에서 처음 실용화되기 전에는, 동네 사람 수십명이 동원되어 진흙탕 속 논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혀가면서 모 하나 하나를 심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허리가 굽은 이유가 그 고된 노동 때문일 것이다.

농부가 탄 승용형 이앙기는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여섯 줄 모를 척척 심는다. 소위 ‘6조식 모심기’를 기적처럼 행한다. 인간은 기계의 도움으로 혼자서도 이 넓은 논에 모를 심을 수 있다. 농촌의 우리 부모님들이 더 이상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은 이유다. 농부는 이앙기를 돌려야만 하는, 모를 심을 수 없는 가장자리만 별도로 모를 손수 작업하였다. 농부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주황색 리버스 물 장화를 신고 정성스럽게 한 모 한 모 심었다. 그는 이 물에 아슬아슬하게 심겨진 모가 2주후면 물과 이랑이 안보일 정도로 자란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과연, 이 모들이 강풍을 이겨냈을까 궁금했다. 나는 이윽고 산책길을 따라 농부가 어제 구슬땀을 흘렸던 밭으로 갔다. 농부도 궁금했는지, 저 건너편에서 어제 강우와 함께 불어 닥친 강풍이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과연 철제의자도 뒤집어 놓은 강풍이 모를 파괴했을까? 진흙탕 속에 느슨하게 심겨진 모가 마르둑 신의 강풍을 이겨냈을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군데군데 휩쓸린 흔적은 있었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한쪽으로 뉘인 모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건재하다.

이 연약한 풀은 건재하고 견고한 의자는 나동그라져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풀은 겉보기와는 달리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을에 볍씨를 내겠다는 ‘의지意志’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향한 풀의 의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 풀은 다른 모든 풀과 나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고귀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티아맛 신도 꺾을 수 없는 고귀한 의지를 품고 있다. 이것이 없다면 어떤 풀이나 나무도 저렇게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없다.

모가 지닌 생명에 관한 의지는 누구도 좌절시킬 수 없다. 햇빛, 공기, 물, 그리고 안개와 같은 자연이 주는 혜택으로 자신의 뿌리를 약해보이는 저 진흙 속에 담구고, 자신의 머리를 끝 알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을 향해 펼쳤다. 지구의 원칙인 중력을 감히 거슬러 높이 올라갈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 빛도 벼에겐 고통이 아니라 알알이 맺을 가을 수확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어제 강풍에 뽑힐 벼와 같았더라면, 농부가 처음부터 파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는 ‘대담大膽’하다. 모는 옆에 있는 다른 모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뿌리를 내린 자신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얻어 곳곳이 그곳에 서있다. 모에게 강풍과 같은 위기는, 가을에 풍성하게 맺을 낱알을 위한 준비일 뿐이다. 나는 오늘 두발을 땅에 디디고 굳건히 설 것인가? 나는 나를 넘어뜨리려는 비바람을, 내 개선을 위한 유일한 수련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것인가?

강풍을 견딘 모들강풍을 견딘 모들

<필자 소개>
고전문헌학자 배철현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하였다. 인류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다리우스대왕은 이란 비시툰 산 절벽에 삼중 쐐기문자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에 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류가 남긴 최선인 경전과 고전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은 책을 썼다.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성서와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성서는 인류의 찬란한 경전이자 고전으로, 공감과 연민을 찬양하고 있다. 종교는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하려는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빅히스토리 견지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하였다. 이 책은 빅뱅에서 기원전 8500년, 농업의 발견 전까지를 다루었고, 인간생존의 핵심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혹은 기술과학 혁명이 아니라 '이타심'이라고 정의했다. <심연>과 <수련>은 위대한 개인에 관한 책이다. 7년 전에 산과 강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여 묵상, 조깅, 경전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블로그와 페북에 ‘매일묵상’ 글을 매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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