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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등록 2019.03.14 15:42

수정 2019.03.14 17:48

이성인

  기자

편집자주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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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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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안유수 - 침대를 정의하다 기사의 사진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들 알 법한, 광고史에서 가장 유명한 카피 중 하나일 텐데요. 침대에 관한 한국인의 인식 구축에 큰 일조를 했을 이 문구는 그저 잘 팔기 위해서 내놓은 말만은 아닙니다.

에이스침대의 창업회장인 안유수 회장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침대에 대한 그의 태도와 철학이 바로 이 카피와 닮았다고 느껴지는데요.

에이스침대는 지난해 기준 19년 연속으로 업계 브랜드 파워 1위를 차지한 대표적인 침대기업으로, 세계 곳곳에 공장을 세워놓은 글로벌 침대제조사이기도 합니다.

물론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안 회장은 1930년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1‧4후퇴 때 피난 왔다가 영영 부모와 헤어지고만 실향민. 기껏해야 일주일일 줄 알았던 이별이 평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는데요.

갈 곳 없었던 그는 미군 내 잡역부가 됐고 자연스레 미군이 건넨 야전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됩니다. 유난히 추웠던 1951년 겨울, 안 회장은 홑겹의 야전침대 위에서 벌벌 떨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따뜻한 매트리스를 깔고 잘 수 있는 침대를 만들 것.’

전쟁 후 채소 행상으로 공부를 이어나간 안 회장, 대학을 마치고는 방송 기자재 납품 일을 합니다. 그러다 종로의 한 가구점에서 다시 ‘침대’란 걸 봤지요. 잊었던 꿈이 떠오른 순간이었다고 안 회장은 회고합니다.

그렇게 침대사업의 꿈을 이어나갔고 1963년 마침내 회사를 세웠습니다. 처음엔 지금과 많이 달랐지요. 서울 금호동에 천막을 짓고, 혼자 스프링을 감고, 나무를 깎았습니다. 주문 하나가 들어오면 온 정성을 쏟았지요.

조악한 업체들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던 시절에 품질로 승부를 건 것. 그에게 침대는 일생의 1/3을 보내는 곳, 즉 고객의 건강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가구 그 이상의 무엇이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안 회장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한 침대의 특성상 본인이 구할 수 있는 최고급의 스프링과 충전물로 내부를 채웠습니다. 인체공학적 설계를 끊임없이 연구했음은 물론입니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겠다.’

그 결과 에이스침대는 침대 문화가 없었던 1977년에 이미 침대 품질 검사 시설을 갖추게 됩니다. 1987년엔 품질관리 1등급 업체로 지정됐고 KS마크 인증을 획득했지요. 모든 게 업계 최초였습니다.

1991년엔 역시 업계 최초로 JIS마크를 획득했습니다. 3년 후엔 세계 최초로 ISO 9001 인증까지 받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 기술을 수출해왔음은 당연.

그렇게 침대는 그에게, 가구가 아닌 과학이었습니다.

마치 ‘도장 깨기’ 같은 품질 업그레이드는 세기를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업계에선 ‘상인’(商人)이 아닌 ‘장인’(匠人)에 가까온 안 회장만의 침대 철학이 그 원천이었다고 말합니다.

‘장인정신을 근본으로 하여 최고의 진선미를 제품에 구현···’

안 회장은 2002년 대표이사 직함을 장남인 안성호 당시 부사장에게 넘기며 공식적으로는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이에게 최고의 침대를 선사해주고픈 마음은 여전해 보이는데요.

“남북한 사람들은 물론 세계인이 우리 침대에서 잠들게 하는 게 우리 목표.”

실향민으로서 그 누구보다 외롭고 추웠을 그에게, ‘포근함의 전파’는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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