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봉을 며칠 앞두고 만난 한지민은 꽤 피곤한 모습이었다. 2011년 상반기 흥행작 ‘조선명탐정’ 이후 3년 만에 선을 보이는 작품이다. 긴장감이 클 법했다.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한지민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인터뷰 스케줄도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단다. 그래도 피곤한 모습 속에서 눈 하나는 생기를 잃지 않았다. 한지민의 전매특허 ‘단아한 이미지’를 살려낼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눈빛이었다.
“너무 긴장을 했는지 감기에 걸려서 컨디션이 사실 좀 좋지 않아요. 인터뷰 강행군도 오랜만인지 좀 적응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 좀 리듬을 찾을 수 있겠네요. 하하하.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지 좀 몽롱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 눈이 그렇게 살아있나요? 하하하.”
그와의 대화 뒤편으로 이제 막 옹알이를 땐 듯한 말썽꾸리기 녀석이 ‘까르르륵’ 웃음 터트리며 돌아다녔다. 한지민과 비슷한, 너무도 비슷한 외모의 한 분이 “쉿”이러며 녀석을 황급히 잡아끌었다. 한지민은 “친언니다. 저 녀석은 내 조카다”면서 “이렇게 힘들어도 저 녀석 보면 엔돌핀이 팍팍 솟는다”며 웃는다. 한지민의 말처럼 눈이 똘망똘망했다. 집안 내력인가 보다. 이 말에 한지민은 웃음을 터트리며 손사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좀 낯이 익었다.
“저 녀석이 나 때문에 데뷔를 한 적이 있어요. 출연하기로 했던 광고에 어린 아이가 필요했는데, 그때 현장에 언니와 함께 따라왔어요. 감독님이 보시더니 관심이 보여주셔서, ‘어릴 때 추억 하나 만들어 줘도 되겠다’ 싶었죠. 지금은 안나오는 데 그때 광고에 출연 뒤 나랑 너무 닮아서 ‘아들’이냐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꼬마 신사도 미남이었고, 친언니 또한 한지민과 비슷하게 단아한 미모를 자랑했다. 집안 자체가 ‘단아함’과 어떤 인연이 있나 보다. 하지만 한지민은 “그게 다 드라마가 날 그렇게 만들었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사실 한지민의 실제 성격은 ‘플랜맨’ 속 유소정을 똑닮아 있다고.
“저랑 어울리지 않는단 분들도 많아요. 저도 사실 좀 그랬어요. 뭐 그런 것 있잖아요. 나랑 너무 닮아서, 오히려 어색한 것. 처음 읽었을 땐 그랬어요.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소정이란 인물이 좀 더 자세히 보이더라구요. 밝은 모습 속에서도 어떤 사연이 보였고, 노래와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캐릭터도 색다름이 좀 보였어요. 무엇보다 상처를 가진 두 인물이 만나 서로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게 매력적이더라고요.”
하지만 한지민이 ‘플랜맨’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바로 정재영 때문이다. ‘플랜맨’ 제작발표회, 언론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한지민은 출연 이유로 ‘정재영’ 만을 거론했다. 정재영이 그동안 보여 준 작품 속 다른 색깔의 모습에 강한 신뢰감이 들었다고. 그의 말을 빌리자면 ‘대체불가능 존재감’이란다.
“그렇지 않아요? 글쎄요. 제가 감히 정재영 선배님을 평가하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스럽지만, 선배님은 출연하는 작품에 자신을 감추는 능력이 있으신 것 같아요. 색깔 자체가 매번 다르세요. 그런 색깔이 ‘플랜맨’ 속 한정석이란 인물에 너무 잘 맞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한정석역에 어울릴까 상상을 했고 나온 답은 정재영 뿐이었어요.”
그의 상상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 출연 여부를 놓고 고심 중이던 한지민의 귀에 정재영의 출연 확정이 들어간 것. 한지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고민이 딱 끝났다”면서 “매니저한테 ‘빨리 제작사에 연락해’라고 말했다”며 발을 굴렀단다. 한지민은 정재영에 대한 일화를 공개했다. 대본 리딩때부터 촬영장에선 너무도 편한 옆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란다. 하지만 딱 한 번 정재영이 무서워 보인 적이 있었다고. 그는 “나와 감독님 정재영 선배 셋이 만나서 회의를 한 적이 있다”면서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재영 선배님의 표정이 달랐다. 뭐랄까 그냥 다른 사람 같았다. 이해가 안되는 장면은 단 한 씬을 가지고 두 시간 세 시간도 질문 공세를 피셨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자신의 눈에는 ‘대단할 수밖에 없고 함께 하고 싶은’ 선배 정재영이 합류했다.
발동이 걸렸다. 한지민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렸다. 우선 극중 소정은 기타를 연주하는 ‘인디 음악계의 여신’ 캐릭터다. 기타를 전혀 치지 못하는 한지민은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그는 “한 6개월 배웠다”면서 “솔직히 즉흥 연기는 못하지만 아는 노래를 제법 칠 줄은 안다”며 배시시 웃었다. 연주를 배우며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기도 여러 번이란다.
“정말 한 번 배역에 빠지니 제가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죠. 기타도 배워야 하고, 노래도 배워야 하고. 노래의 경우 그냥 즐기는 정도였는데, 이게 배우다 보니 욕심이 생기는 거 있죠? 그냥 내지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됐고. 그런데 너무 욕심을 냈는지 연습이 과했는지 후두염까지 앓았다니까요. 영화 속 제 노래 실력, 진짜 제 노래랍니다.”
정재영의 코믹한 연기 스탠스와 한지민의 반전 코믹 매력이 ‘플랜맨’의 매력이다. 하지만 ‘플랜맨’의 진짜 매력은 단순하게 웃기는 영화가 아니란 점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하나씩은 갖고 있는 일종의 정신병적 증세 ‘강박증’에 대한 생각을 일깨워 준다. 좀 더 풀어보면 ‘누구나 아픔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자는 것.
“극중 정석이나 소정이나 색깔은 다르지만 아픔을 갖고 있어요. 특히 정석과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한 번씩은 볼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거부감이나 그런 편견을 갖게 되요. 그 사람의 사연도 모르면서. 그런 편견 자체가 옳지 못하는 얘기를 ‘플랜맨’은 하고 있어요. ‘플랜맨’ 자체가 다소 희극적인 부분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얘기 같아요.”
한지민은 다소 진지한 모습으로 ‘플랜맨’의 주제를 설명했다. 강박증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습득한 듯 했다. 한지민에게 궁금해졌다. ‘혹시 한지민도 강박증을 앓고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한지민은 “나라고 없겠나”라면서도 “뭔지 밝힐 수는 없다”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당분간은 단아함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란다. 해보고 싶은 장르나 역할은 미스터리 추리물 속에서 어둡고 음습한 배역이라고 꼽는다. ‘한지민이 그런 역할을?’이라고 놀라자 “시켜만 주시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며 자신만만해 한다. 그 모습이 제법 유쾌해 보였다. ‘플랜맨’ 속 소정이가 느껴질 만큼.
이제 결혼 적령기다. 함께 온 조카가 카페 안을 휘집고 다니는 데 그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본다. ‘조카를 보면 결혼 생각이 안드나’라고 묻자 “너무 귀엽지 않나. 조카를 보면 당장이라도 결혼해 아이를 낳고 싶은 데, 결혼이 내 마음대로 되나”라며 “뭐 혹시 모른다. 당장 내일 결혼한다고 발표를 할지도. 하하하. 그만큼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플랜맨’을 봐라. 인생은 계획을 세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며 우문현답으로 마무리를 한다.
매번 그를 보면서 다른 배우의 이름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부턴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배우 한지민, ‘플랜맨’ 이후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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