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사금고화 막자"···40년 묵은 낡은 규제 그대로 디지털 전환기 역기능 부각···가상자산·플랫폼 발 묶여 사회적 합의까지 진통 예상···전문가 "특별법 제정 필요"
은산분리 규제는 1982년 은행법 개정으로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15%로 제한하면서 제도화됐다. 재벌이 은행을 통해 계열사 부실을 메우는 걸 막겠다는 취지였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금융산업구조개선법 등으로 규제가 대폭 강화돼 현재는 산업자본의 은행 의결권 지분 보유 한도가 4%(비의결권 포함 최대 10%)로 줄었다. 다만 2018년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이 만들어지며 ICT기업에 한해 최대 34%까지 예외가 허용됐다.
문제는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허물어진 디지털 전환기에 이 규제가 혁신을 막는 족쇄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은행권은 핀테크 기업은 자유롭게 금융업에 진출하는데 정작 은행은 비금융 분야 진출이 가로막혀 있다며 역차별을 호소해 왔다. 부수업무 확대, 자회사 업종 제한 완화 없이는 플랫폼 경쟁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은산분리, 산업자본 견제에서 금융혁신 족쇄로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210개 금융사 대상 '금융회사의 비금융업 영위 현황과 개선 과제'를 조사한 결과 응답 회사의 88.1%는 해외 금융사 및 빅테크와의 경쟁에서 비금융업 진출을 막는 국내 칸막이 규제가 경쟁에 불리하다고 답했다. 규제 개선을 위한 구체적 정책 과제(복수 응답)로는 금융회사의 부수 업무 범위 확대(55.2%), 자회사가 영위할 수 있는 비금융업종 범위 확대(53.3%) 등을 꼽았다.
규제 개선을 위한 구체적 정책과제(복수응답)로는 '금융회사의 부수업무 범위 확대'(55.2%)가 첫 손에 꼽혔다. 이어 '자회사가 영위할 수 있는 비금융업종 범위 확대'(53.3%)와 '비금융사 출자한도 완화'(41.9%),'혁신금융서비스 개선'(40.0%), '금융회사의 본질적 업무 위탁 허용'(31.4%) 등이 뒤를 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금융과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Big Blur) 시대가 개막하면서 은산분리 규제는 융합 비즈니스의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은산분리 규제 탓에 은행들은 가상자산, 해외 핀테크 인수, 빅테크 협업 등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금융 혁신'을 앞세워 등장한 인터넷전문은행들은 출범 초기부터 은산분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카카오뱅크는 대주주인 카카오가 산업자본이라는 이유로 증자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부가 특례법을 마련한 뒤에야 카카오가 카카오뱅크의 최대주주 자리에 오른 바 있다.
최근 은행권은 가상자산 커스터디나 거래중개 등 서비스 진출을 타진하고 있지만 사업 추진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에 은행연합회는 새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6월 19일 국정기획위원회에 '경제 선순환과 금융산업 혁신을 위한 은행권 제언' 보고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은행법 개정을 통해 은행의 겸영 업무에 디지털자산업을 추가하고 '금융회사의 핀테크(금융기술) 투자 가이드라인'에서 금융회사가 투자할 수 있는 핀테크 업체의 범위에 디지털자산·블록체인 기업을 더해달라는 내용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법적으로 당국 인허가 시 은행의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디지털자산 수탁업 등이 가능해진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한국은 IMF 사태, 저축은행 사태 등 뻐아픈 금융위기 경험을 갖고 있고, 재벌 중심 경제구조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섣부른 은산분리 완화가 금융 대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디지털 전환 물결 속 한국 금융만 거꾸로
반면 세계 주요국들은 은산분리 장벽을 점차 허무는 추세다. 미국은 1999년 금융현대화법(그래엄-리치-블라일리법)으로 산업자본의 금융지주 소유를 일부 허용했다. 일본은 2016년 은행법 개정으로 핀테크·IT기업 출자 제한을 완화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춰 과도한 규제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비금융업을 통해 다양한 경제·사회적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JP모건체이스의 자회사 체이스은행은 여행 플랫폼 '체이스 트레블'을 출시해 미국 5위(2023년) 여행사로 성장시켰다. 모건스탠리그룹도 2019년 이후 4개의 헬스케어기업을 직접 인수해 해당 분야의 인수·합병(M&A) 추진 및 자문 등을 선도하고 있다.
유럽 최대 금융회사인 HSBC도 지난 2021년부터 인공지능(AI), 보안, 결제서비스, 관련 기업을 인수해 2024년 전년 대비 매출 30% 증가, 모바일 결제액 220% 증가 등의 성과를 냈다. 2020년 일본 야마가타은행은 지역 상사(TRY 파트너스)를 통한 지역상품 판매로 수익성을 개선했다.
은산분리 규제 완화 요구가 고조되자 지난 2023년 금융당국은 국내 금융사의 해외 비금융회사 M&A 규제 완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간 국내 은행이나 금융지주는 해외에서도 비금융기업을 인수하기 어려웠는데, 이를 개선해 해외 진출 시 인수합병 전략을 활용할 수 있도록 문호를 넓힌 것이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은산분리 관련 입법 및 제도 개편의 방향성이다. 특히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제한 완화 여부, 금융지주 및 은행의 부수업무 범위 확대 폭, 핀테크 및 빅테크와의 협력 모델 등에 대해 사회적 합의부터 선행돼야 한다.
혁신·안정 균형 맞춘 규제 개편 시험대 올라
새 정부는 속도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점진적인 규제 완화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의 경쟁력 강화와 디지털 혁신을 지원하되 그 과정에서 소비자 보호와 금융안정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절제된 변화를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은행-비은행이 상호 보완적 관계를 지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은행의 ICT업무 겸영은 금융그룹의 성장성과 수익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며 "은행이 주도적으로 금융 디지털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은행의 ICT업무 및 ICT기업 소유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일각에선 은산분리 규제 완화에 따른 부작용을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은행의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 규제완화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서지용 상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뉴스웨이와의 통화에서 "한국과 같이 은행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에서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게 되면 소비자 보호와 재벌의 사금고화 등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며 "은행법과 같은 상위법을 개정하기보다는 특별법을 제정해 일부 사례에 한 해 규제를 풀어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뉴스웨이 박경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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