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은 지난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어선과 항공기 납치해오던 북한은 1966년 경남 진주시 덕의마을에 재일교포로 위장한 침투조 3인을 투입했다.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체포됐지만 우리 측 순경 1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듬해인 1967년 1월에는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대로부터의 기습공격에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무장공비 250여명이 태백산지구 산악기지구축을위해 강원·충남·전북·전남 등 전국적으로 침투해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1968년에는 그 유명한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를 습격 기도하던 중 국군과의 교전에서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이 사살됐다.
이렇게 북한은 1960년대에만 6번의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1970년대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포함해 6번, 1980년대 버마 아웅산 폭탄테러와 판문점 총격 사건 등 4번, 1990년대에는 강릉 무장간첩 침투를 비롯한 8차례의 도발이 이뤄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북한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2002년과 2009년 1,2차 서해교전이 있었으며 2010년에는 연평도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북한의 도발에는 통상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존재했다.
첫째는 정권유지 수단으로서의 활용이다. 지도세력의 위엄을 드러내는 동시에 체제 결속을 꾀하기 위해 북한은 대남 도발을 추진했다.
둘째는 식량 등의 해외 원조의 필요성이다. 안그래도 물자가 모자라는 북한은 각종 미사일 및 핵개발에 돈을 쏟아붓는 바람에 더욱 빈곤해졌다. 때문에 무력을 과시해 스스로 ‘문제 국가’로 발전한 북한은 한반도 긴장 상태를 만들어놓고 협상의 주도권을 갖는 방법을 즐겨 이용해왔다.
다행히 이번 도발위협은 말로만 그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키 리졸브 훈련에 대한 시위성 성격이 강한 데다 아직 집권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김정은 체제의 공고함을 다지기 위함이라는 분석이다.
이창희 기자 allnewguy@
뉴스웨이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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