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들은 ‘기황후’의 인기 중심에 하지원이 있다고 믿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황후’의 진짜 인기 동력은 단언컨대 원나라 황제 ‘타환’을 연기한 지창욱이었다. 사실 ‘타환’은 그의 배역이 아니었다. 한류 톱스타의 출연이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은 지창욱이었다. 방송가에선 반신반의했다. ‘웃어라 동해야’ ‘무사 백동수’ 등을 통해 검증된 TV스타였지만 ‘한 방’이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완벽한 기우였다. ‘기황후’ 속 ‘타환’은 지창욱을 통해 완벽하게 살아났다. 지창욱이 아니면 절대 누구도 생각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로.
‘기황후’가 종영 후 한 참이 지나고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지창욱은 조금 야윈 모습이었다. 50부작 드라마에 매달리느라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어서 종영 후 친구들과 만나 오랜만에 회포도 풀고 팬미팅 준비도 하는 등 나름 바쁘게 보내고 있다고. 특유의 밝고 경쾌한 느낌은 여전했다. 종영 직전 ‘기황후’ 속 어둡고 음습한 ‘타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 원래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웃음). 꽤 재미도 있고 너무 밝아서 좀 걱정이란 분도 계세요. 초긍정 마인드?(웃음). 사실 타환이 나랑 잘 맞을까란 생각은 했어요. 원나라 황제역할이라는데. 그런데 대본을 보니 정말 재밌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죠. 우선 배우인 제가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정말 많을 것 같았어요. 그게 정말 흥미를 당기게 했죠. 우선 변화가 아주 많은 캐릭터잖아요.”
그의 말처럼 타환은 극 전체를 통해 가장 감정 변화가 심한 인물이다. 유약한 황태제에서 겁 많은 황제 그리고, 각성을 통해 진정한 군주로 거듭나는 황제, 마지막에는 정신분열로 인해 자아가 붕괴되는 모습까지. 한 인물을 통해 이처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도 드물다. 아니 배우라면 이런 배역이 자신에게 온 것을 감사해야 할 정도다. 지창욱 역시 “정말 운이 좋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웃었다.
“타환은 정말 배우라면 매력적인 캐릭터에요. 하지만 큰 약점도 있죠. 너무 변화가 심해서 잘못하면 시청자들에게 몰입감을 방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정한 룰이 하나 있었죠. ‘승냥(하지원)이에 대한 마음 하나만은 끝까지 끌고 가자’였어요. 그 일관성이 타환을 연기하는 동안의 가장 큰 숙제였죠. 어떤 순간에서도 시청자들이 ‘타환이 승냥을 사랑하고 있구나’란 점을 알게 하는 거였죠. 아 다른 하나도 있었어요. 초반에 제가 진짜 민폐남으로 나오잖아요. ‘어떻게 하면 밉지 않게 보일까’였는데 어떠셨어요?(웃음)”
방송이 끝난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타환’은 지창욱이 아니면 다른 배우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타환’에는 한 톱스타의 출연이 거론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창욱에게 이 배역이 돌아갔다. 지창욱은 ‘대타’라는 단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로서 자신에게 의문을 품는 것에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감독님 작가님 동료 배우들이 ‘과연 잘할까’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혼자 상상했나 봐요. 사실 걱정 많이 하셨겠죠. 제가 지금까지 해온 배역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니깐. 제가 생각해도 그런데요 뭘.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캐릭터 분석을 하고 다른 배우들과의 연기 합에도 신경을 더 쓴 거 같아요. ‘대타?’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제가 완벽하게 소화하면 그게 제 것이 되잖아요. 하지만 저도 배우인데 저한테 의문을 품는 것에는 솔직히 자존심 상하죠.”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나 보다. 방송이 이어질수록 시청률은 상승했고, 지창욱은 그 안에서 단연 빛이 났다. 첫 방송이 나간 뒤 작가에게 받은 전화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고. ‘방송 재밌게 봤다. 잘 해줘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지창욱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다고 한다.
“정말 많은 대화를 했어요. 조금도 뒤지기 싫었죠. 우선 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어떤 톤으로 이끌어가야 할지 감독님과도 선배 하지원 주진모와도 대화를 했어요. 결국 나온 답은 ‘비극’이었어요. 승냥이도 왕유도 타환도 그렇게 사랑을 원했지만 결국 세 사람 모두 아무도 그 사랑을 얻지 못하잖아요. 글쎄요. 내 사랑을 위해 남을 죽이고 얻은 그 사랑이 진짜일까. 제가 실제 타환이라면, 전 정말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대화를 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지창욱은 ‘기황후’의 대본이 유독 어려웠다고 혀를 내둘렀다. 회를 거듭할수록 음모와 배신, 그리고 수없이 변하는 감정의 결을 쫒아가기에 정말 너무도 힘이 들었다고.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지창욱을 든든하게 받쳐 준 인물이 극중에선 철천지 원수로 등장한 ‘연철’역의 중견배우 전국환이었다. 이미 지창욱과는 ‘무사 백동수’과 ‘다섯 손가락’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전국환 선생님과는 아버지와 아들이 됐어요.(웃음) 저한테도 실제로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세요. 작품에선 그렇게 무섭고 근엄하게 나오시는데 실제로는 정말 유머스러하시고 후배를 대하시는 데 너무도 조심스러워 하세요. 전 선생님에 비하면 보이지도 않는 후배인데 조언을 해 주실 때도 너무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세요.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웃기만 하세요. 어휴, 아무튼 선생님 때문에 ‘기황후’의 타환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연철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타환의 존재감도 커진 것 같아요. 좀 더 작품 속에서 계시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얼마나 아쉬웠는데요. 하하하.”
‘기황후’를 통해 지창욱은 분명 달라졌다. 아니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다. 대중들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고, 그를 바라보는 방송가 혹은 충무로 영화계 관계자들의 시선도 이미 달라졌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대본과 시나리오가 지창욱에게 향하고 있다. 지창욱은 “다 헛소문”이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이미 지창욱은 ‘대세’ 그 자체다.
“전 언제나 그 지창욱 그대로에요. ‘무사 백동수’를 했을 때도 ‘웃어라 동해야’를 했을 때도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시고 저한테 바람도 좀 넣어주시고 그랬죠. 그런데 저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 자체가 체질적으로 스타 의식이라든지 그런 걸 즐기지를 못해요. ‘기황후’ 찍으면서도 동네 친구들과 좀 연락이 소원해졌거든요. 전 그냥 지창욱이에요. 그래서 촬영 끝나고 만나서 새벽까지 술 먹으면서 묵은 얘기도 털었죠. ‘기황후’로 인기가 높아졌다구요? 전 그냥 지금도 앞으로도 그리고 쭉 지창욱이에요.”
지창욱은 ‘타환’과 작별을 하게 됐으니 이제 ‘기황후’도 자신에게 또 다른 좋은 추억이라고 전한다. 그냥 씩 하고 웃는 지창욱의 모습이 참 색달랐다. 이 배우, 분명 다른 연예인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지창욱, 그의 말처럼 그는 앞으로도 계속 ‘연예인 지창욱’이 아닌 ‘배우 지창욱’으로만 남을 것 같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cine517@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