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안정감의 XC90볼보 전기차의 미래 EX90두 플래그십의 특별한 매력
차를 타는 일은 일기장을 가꿔나가는 일과 비슷합니다. 출퇴근길의 꽉막힌 정체, 주말 나들이의 설렘, 그 공간을 채우는 가죽의 감촉과 오디오의 울림까지. 같은 길을 달려도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하루의 인상이 달라질 수 있죠. 누군가에게 자동차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이동 수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과 추억을 쌓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동차는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기쁠 때나 지칠 때나 묵묵히 곁을 지키는 파트너죠.
수많은 패밀리 SUV 가운데 볼보의 90 시리즈는 가족의 안식처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차갑고 세련된 스웨디시 디자인 뒤에 숨겨진 묵직한 안전함, 그 힘이 XC90을 향한 로망을 이끌어냈죠. 그 안식처가 한발 나아가 엔진 소리를 지우고 전기의 힘으로 세대교체를 선언했습니다. XC90과 EX90, 두 거함을 연이어 타보며 느낀 스웨덴식 고집과 변화, 그리고 조금은 아쉬웠던 대목들을 차례대로 적어보겠습니다.
익숙함 속에 숨은 완성도, 볼보 XC90
먼저 XC90입니다. 도로에서 마주칠 때마다 "참 깔끔하고 질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차죠. 현행 2세대 모델은 2015년 처음 등장했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두 차례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디자인과 편의사양을 꾸준히 다듬었습니다. 유행을 좇기보다 자신만의 디자인을 지켜온 덕분일까요. 최신 자동차의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오랜 시간 도로 위에서 쌓아온 익숙함이 XC90의 매력입니다.
도어를 열면 특유의 차분한 실내가 반깁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과한 색상으로 시선을 끌기보다 소재와 선을 정돈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센터페시아 디스플레이입니다. 기존 매립형에서 화면이 앞으로 살짝 떠 있는 플로팅 타입으로 바뀌었습니다. 화면을 대시보드 안쪽에 묻어두던 기존 구성과 달리 운전석에서 시선이 닿는 위치가 한층 또렷해졌습니다. 시각적으로 현대적인 인상을 주면서 동시에 주변 공간도 한결 여유로워 보입니다.
이번 시승 트림은 B6 AWD. 가격으로나 성능으로나 아마 가장 많이 고려하실 트림일텐데요. 2.0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과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조합으로 차체를 차분하게 밀어붙입니다. 속도를 높이는 과정에서도 엔진 존재감이 지나치게 도드라지지 않고, 변속 과정 역시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정차 후 출발하거나 엔진이 다시 작동할 때도 이질감이 크지 않습니다. 코너에서는 높은 차체가 느껴지지만 움직임이 쉽게 흐트러지지는 않습니다. 날렵하게 코너를 공략하는 차라기보다 운전자와 탑승객이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안정감에 무게를 둔 세팅입니다.
운전하면서 칭찬하고 싶었던 부분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조작부입니다. 스티어링 휠 왼쪽 버튼 하나로 설정과 취소, 리셋을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기능마다 버튼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으니 운전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안전을 강조하는 브랜드다운 배려입니다.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순정 티맵 연동도 훌륭합니다. 초행길에서도 시선을 크게 돌리지 않고 길 안내를 확인할 수 있어 편해요. 200km가 넘는 도심·고속도로 복합 구간에서 기록한 누적 연비는 리터당 12.5km 안팎. 차체 크기와 사륜구동 시스템까지 고려하면 준수한 효율입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습니다. 전화가 걸려오면 센터 디스플레이는 물론 계기판의 내비게이션 화면까지 수신 창에 가려집니다. 중요한 갈림길에서 전화가 오면 순간적으로 길을 놓칠까 걱정스럽습니다. 계기판 한쪽에 작게 표시하는 정도로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버튼 하나로 뒷좌석 헤드레스트를 접는 기능도 있는데, 정작 2열 헤드레스트가 접히네요. 후방 시야를 확보하려면 뒷유리와 가까운 3열 헤드레스트가 먼저 접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작은 부분이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XC90은 오랜 시간 다듬어온 완성도가 돋보이는 차입니다. 부드러운 동력 전달과 안정적인 주행 감각, 직관적인 조작 방식은 오랜 시간 플래그십 SUV를 만들어온 볼보의 노하우를 보여줍니다. 세부적인 편의 기능에서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사용 경험을 해칠 정도는 아니에요. 처음 운전대를 잡아도 금세 익숙해지고, 장거리 주행에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이 XC90의 강점입니다. 화려한 변화보다 검증된 완성도를 중시하는 운전자라면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입니다.
미래로 향하는 안락함, 볼보 EX90
XC90의 익숙한 편안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전기 플래그십 SUV EX90에 올랐습니다. 겉모습은 XC90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X9C0이 세대 교체를 했다면 딱 이런 모습일 듯. 실내에 들어서면 넉넉한 공간과 한층 고급스러워진 소재가 눈에 들어옵니다. 높은 지붕 덕분에 머리 위 공간도 여유롭습니다. 물리 버튼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대부분의 기능을 디스플레이에 통합했습니다. 깔끔한 실내를 만드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주행 중 직관적인 조작을 중시하는 운전자라면 호불호가 갈릴 만한 구성입니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그래픽이 깔끔하고 반응도 민첩합니다. 운전대 위쪽에 자리 잡은 작은 스크린은 시선 이동을 줄여줘 매력적입니다. 화면 속에서 아기자기하게 작동하는 순정 티맵도 반갑습니다. 다만 도로 제한속도가 표시되지 않는 점은 아쉽습니다. 다음 업데이트에서는 꼭 개선되길 바랍니다.
전기차를 탈 때면 배터리 잔량과 주행거리를 확인하는 일이 습관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주행 가능 거리가 400km만 넘어도 안심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런데 배터리 90% 상태에서 확인한 EX90의 잔여 주행거리는 무려 630km였습니다. 전기차로도 500km, 600km의 벽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시대가 왔음을 실감합니다.
본격적으로 달리면 EX90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지막지하게 힘 세면서 정말 조용한 거구'입니다. 시승 모델인 트윈 퍼포먼스 모델 출력은 670마력에 달하거든요. 웬만한 내연기관 스포츠카는 명함도 못 내밀 엄청난 출력이죠. 무지막지한 힘을 네 바퀴로 알뜰히 쏟아냅니다. 2.7t 넘는 차체가 가속 페달을 밟는 대로 민첩하게 앞으로 나아가요. 그런데 실내는 적막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합니다. 마치 거대한 스웨덴식 음악 감상실에 앉아 가속을 즐기는 기분입니다.
승차감은 의외로 아쉬웠습니다. 서스펜션 설정 메뉴에서 감도를 조절할 수 있는데, 부드럽게 설정해도 XC90과 나란히 비교하면 기본적인 승차감은 EX90이 조금 더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차체가 큰 만큼 묵직하고 안정적인 움직임을 기대했지만, 노면의 굴곡을 넘을 때는 그 차이가 분명합니다. 서스펜션 감도를 조절하면 승차감의 성격도 달라지지만, XC90에서 느꼈던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결이 다릅니다. 안락함보다는 차체를 탄탄하게 지탱하는 쪽에 무게를 둔 듯한 인상입니다. 부드러운 승차감을 우선하는 운전자라면 시승 과정에서 설정별 차이를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비도 준수합니다. 배터리 약 50%로 300km를 주행했고, 이후에도 280km 이상을 달릴 수 있다고 나오네요. 출발 전 확인했던 630km라는 숫자가 마냥 허풍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여유롭게 운행을 마치고 100%까지 충전하자 이번엔 710km까지 치솟습니다. 정말 든든해요. 에어컨을 켜고 도심과 고속도로를 두루 달린 전비는 16.8kWh/100km. 맞습니다. 전비 단위가 국내 운전자에게 익숙한 'km/kWh'가 아니라 'kWh/100km'로 표시됩니다. 이건 꼭 업데이트로 수정해줬으면 합니다. 참고로 16.8kWh/100km면 약 6km/kWh 입니다.
말 나온 김에 단점 나열 시간. EX90은 익숙한 조작 방식까지 미래적으로 바꾸려다 오히려 불편해진 부분이 있습니다. XC90에서는 스티어링 휠 버튼 하나로 해결하던 크루즈 컨트롤 리셋을 EX90에서는 변속 레버를 길게 내려야 처리할 수 있습니다. 짧게 한 번 조작하는 방식이 더 직관적일 텐데 아쉽습니다.
1억원 넘는 플래그십인데 2열 편의사양도 아쉽습니다. 중앙 팔걸이는 각도 조절이 안 되고 통풍 시트와 측면 수동 선바이저도 빠져 있습니다. 가족을 태우는 대형 SUV라는 점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구성입니다. 실내를 은은하게 밝힌다는 샤이 테크 앰비언트 라이트는 이름처럼 수줍음이 많아 밤에도 존재감이 희미합니다.
시간의 훈장과 미래의 초대장
XC90과 EX90을 연이어 타보니 오랜 세월 손때가 묻은 원목 가구와 첨단 소재로 만든 최신형 스마트 가구를 차례로 경험한 기분입니다. XC90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오랫동안 다듬어온 마일드 하이브리드의 부드러움, 직관적인 조작과 익숙한 안정감은 지금 선택해도 만족도가 높을 차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랜 시간 숙성한 맛집의 국물처럼, 새로움보다 검증된 완성도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EX90은 볼보가 내놓은 미래의 초대장입니다. 600km를 넘나드는 주행거리와 압도적인 정숙성, 강력한 가속 성능은 대형 전기 SUV가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한껏 펼쳐 보입니다. 일부 편의사양과 조작 방식은 아쉽지만, 거대한 차체가 선사하는 안락함과 여유는 분명한 장점입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익숙하고 검증된 일상을 원한다면 XC90을, 한발 앞선 전기차의 정숙함과 강력한 성능을 경험하고 싶다면 EX90을 권하고 싶습니다. 둘은 같은 볼보의 플래그십이지만 지향하는 시간은 조금 다릅니다. XC90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신뢰라면 EX90은 앞으로의 가능성입니다. 어느 쪽을 고르든 두 거함은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을 든든하게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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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권지용 기자
senna@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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