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가 개봉하기 이틀 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장동건은 항상 외모적 우월함을 통해 관객들에게 판타지를 주는 배우였다. 그의 전작 ‘위험한 관계’를 보라. 치명적 매력의 바람둥이 ‘세이판’에게 대체 어떤 여자가 넘어가지 않을 법한가. 그래서 일지 모른다. 그는 항상 자신의 내면속에 숨은 강한 남성에 대한 동경이 있었단다. ‘우는 남자’와 만난 이유가 그랬다.
“사실 감독님과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녀서 잘 알고 지냈죠. 더욱이 전작인 ‘아저씨’를 너무 좋아했어요.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 땀 냄새 나고 피 냄새가 나는 액션이 담긴 영화, 거기에 어둡고 음습한 기운의 정서까지. 그냥 쉽게 말해 느와르에 대한 욕구가 있었죠. 저 스스로도 느와르란 장르를 너무 좋아하구요. 더욱이 이정범 감독이 느와르를 한다고 하시잖아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택한 감독님의 확신에 아무런 생각도 안들었죠. 이건 그냥 해야 한다. 그 정도(웃음).”
문자 그대로 고민 없이 그냥 덥석 물었다. 사실 장동건이 ‘물었다’기 보단 이정범 감독도 처음부터 장동건을 원했단다. 이정범-장동건, 두 희대의 트렌드세터들이 만났으니 ‘우는 남자’는 잘 될 수밖에 없는 기본 골격을 갖춘 셈이다. 여기에 최근 연기 포텐이 터졌다는 평가를 받는 김민희까지 합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고민은 남아 있다. 장동건이 연기할 인물이 바로 ‘킬러’다. 총을 다루는 킬러란다. 대한민국에서 총이라니.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그럴 것이고, 나도 그랬다. 심지어 감독님도 그랬으니. 총기 액션에 대한 타당성을 어떻게 주느냐가 첫 번째였어요. 국내에선 총기 소지가 원천적으로 불법이잖아요. 서울 시내에서 총싸움이 일어나고. 되도록 어색하지 않아야 했죠. 뭐 영화적인 장치는 감독님이 당연히 책임지실 부분이고, 전 어색하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게 제 역할이었죠. 먼저 감독님한테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총기와 같은 모형총을 선물 받았죠. 잘 때 침대 곁에 두고 자기도 했어요. 촬영 전에는 미국 CIA, FBI 교관들에게 2~3일 정도 실제 요원 들이 받는 훈련도 받았어요.”
총기 액션 설명 부분에서 장동건은 신이 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동안 남성적인 영화에 목이 말랐다는 그의 말이 ‘포장용’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손으로 권총 파지법부터 소총 종류와 총소리의 크기 등등을 모션을 취하면서 설명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극중 출연하는 한 외국배우의 도움도 컸단다. 이 배우가 실제 군인 출신이며 이라크 전쟁까지 참전한 경력의 소유자라고. 장동건은 “영화를 잘 보시면 뭔가 틀린 분이 계실 것이다”면서 “그냥 총을 쥐는 손 모양까지도 우리와는 격이 틀렸다”고 웃었다. 워낙 격한 액션이 많아서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영화 후반부에 보면 왼팔을 거의 못쓴 채 장동건은 연기를 한다. 실제 왼 팔을 촬영 중 다쳤고, 감독의 배려로 격투 장면에서 왼 팔을 다친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총기 액션이 주를 이루다보니 이정범 감독의 전작 ‘아저씨’에서 보여 준 역동적인 맨몸 액션의 맛은 솔직히 덜하다. 하지만 스케일과 화끈함에선 남성의 마초성을 더욱 건드리는 파괴력이 ‘우는 남자’에 가득하다고 장동건은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연기한 킬러 ‘곤’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느와르에 대한 욕구, 액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지만 진짜 장동건을 움직인 것은 ‘곤’이란 인물이었다.
“킬러란 특수한 직업(?)이란 것보다 엄마에게 버림 받은 인물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죠. 이게 보기에 따라선 정말 통속적이고 뻔한 느낌으로 갈 수 있잖아요. 숙제는 어떻게 킬러와 엄마에게 버림 받은 인물의 트라우마를 현실과 맞닿게 만들까 였죠. 여러 비슷한 영화들도 보고, 특히 해외 입양된 분들의 수기를 좀 읽어 봤어요. 그분들이 어떤 마음 속 상처를 갖고 있는지를 조금은 느끼게 됐죠. 킬러란 인물, 표현하기에 따라선 정말 멋지게 나갈 수도 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감독님도 오케이를 하셨고.”
인물에 대한 구심점은 완성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장동건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이다. 킬러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총으로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 영화라고 하지만, 또 연기라고 하지만 이건 다른 살인마 연기와 차원이 틀리다. 장동건 역시 동의했다. 이 감독도 그런 부분이 걱정이 됐나 보다. 크랭크인 전 장동건에게 경악스런 제안을 했단다.
“살인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했죠. 이건 어디서 해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경험을 해볼 수도 없고(웃음). 그런데 감독님이 진짜 살인에 가까운 경험을 해보자고 제안을 하셨죠. 어느날 갑자기 ‘돼지를 잡으러 가자’고 하시는 거에요. 진짜 도살장에서 직접 돼지를 죽여보자는 거죠. 순간 겁이 덜컥 났어요.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수 없이 되 뇌였는데, 결국에는 가진 못했어요. 그런데 아마 그때 제가 오케이 했으면 진짜 감독님은 갔을 거에요. 어휴(웃음)”
킬러란 직업,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된 인물, 친모에게 버림 받은 트라우마 등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 ‘곤’의 연기는 사실 영화 속에서 그의 타깃이 되는 최모경(김민희)으로 인해 완성된다. 곤이 느끼지 못한 아니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모성이 모경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모경에게 곤은 엄마의 그리움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김민희와는 영화 속에서 딱 한 신이 함께 나와요. 직접적인 교감 장면은 없지만 그를 통해서 곤이 심경의 변화를 느끼는 것을 표현해야 했죠. 많은 관객들이 곤의 심경 변화를 모경에 대한 죄책감에서 찾으려고 할거에요. 하지만 팁을 좀 드리자면 곤은 모경을 통해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 그리움을 통해 킬러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는 것도 있어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제 대사인 ‘너무 피곤해서’란 말도 같은 맥락이에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삶의 과정을 모경의 눈물을 통해서 반성하는 거죠. 모경을 지키고 살려야 겠다는 것보단 모경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유치원생 아들과 갓난쟁이 딸을 둔 장동건은 ‘아빠’가 된 뒤 한 가지 연기적 노하우가 생겼단다. 이번 영화를 촬영할 때도 그랬다. 피칠갑 연기를 한 뒤에도 ‘퇴근’을 하면 아이들에겐 더 없이 상냥하고 친근한 아빠가 될 수 있는 법을 터득했다고. 쉽게 말해 ‘감정 유지’의 시간이 총각 때보다 확연하게 짧아졌단다. 작품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단 얘기다. 삶에 대한 경험치가 크다는 얘기도 된다. 이정범 감독도 그래서 ‘우는 남자’의 ‘곤’이 장동건이어야만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연하게도 총각 시절에는 작품 속 감정의 유지를 깨트리는 외부적 요인이 없었죠. 집에 가도 나 혼자 가만히 작품 속 인물의 느낌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가정이 생기고 아이들이 있다 보니 그럴 수는 없더라구요. 사람 죽이는 연기를 하고 나서도 집에 가선 아이들과 웃고 놀아야 하고(웃음). 그리고 다음 날에는 다시 아이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집을 나선 뒤 현장에선 총싸움을 벌여야 하고(웃음). 예전에는 참 힘들었는데, 이젠 잘 되요. 순간적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같은 날 개봉하는 같은 장르의 ‘하이힐’ 그리고 조금 앞서 개봉한 ‘끝까지 간다’의 선전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장동건 역시 충분히 수긍했다. 자신의 목마름이 선택한 작품이고, 또 그 만큼 자신이 있었다. 뭔가 보여줘야 했다. 결과는 이미 나왔다. 경쟁작 두 작품 모두 공교롭게도 장동건의 ‘절친’들이 참여한 작품들이다.
“‘하이힐’은 워낙 친한 장진 감독이 만드신 작품이라 기대가 크죠. 사실 초고 시나리오는 저한테도 보여주셨어요. 캐스팅 제의는 아니고 모니터링 수준이었죠. 당연히 전 엄두가 안나는 캐릭터더라구요. 차승원씨가 워낙 출중하게 연기를 하셨단 소문을 들어 알고 있어요. ‘끝까지 간다’는 선균이가 정말 고생을 했단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학교때부터 워낙 친해서(웃음). 그냥 저희 영화와 ‘하이힐’ ‘끝까지 간다’ 다 잘됐으면 하는데 안될까요.(웃음)”
앞으로 ‘악역’에 대한 욕심도 마지막으로 드러냈다. 곽경택 감독의 ‘태풍’에서 보여 준 강렬하면서도 이유가 있는 악역이 매력적이란다. 관객을 설득할 명분이 있다면 장동건은 악랄함도 가능하고 욕심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장동건의 얼굴에서 악랄함을 뽑아낼 연출자가 있을까. 아니 없을 것 같다. 단 장동건이라면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 악랄함도 뽑아낼 듯하다.
영화 ‘우는 남자’, 장동건을 ‘기억되는 배우’로 만들 분명한 작품이라 확신한다. 이미 장동건 스스로가 그걸 알고 선택하지 않았나.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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