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숫자의 착시와 부끄럼 전략의 한계: 한국형 주주행동주의가 가야할 길

전문가 칼럼 류영재 류영재의 지속가능 경제

숫자의 착시와 부끄럼 전략의 한계: 한국형 주주행동주의가 가야할 길

등록 2026.02.2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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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 시트 밖의 진실: 경영은 숫자가 아닌 통찰에 가깝다

주주행동주의자들이 기업을 압박할 때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무기는 숫자다. 이들은 정교한 재무적 밸류에이션과 피어그룹과의 비교 등을 통해 해당 기업이 얼마나 저평가되어 있는지, 비용 감축 및 주주환원 확대 여력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엑셀 시트 위에 담는다. 이러한 이들의 숫자는 강력한 객관적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 경영이란 재무 숫자로 온전히 설명, 재단될 수 없는 복잡계다. 행동주의자들은 단기적 재무 지표 위주로 기업을 압박하기 쉬우나, 경영 현실은 숫자 너머의 통찰과 직관, 그리고 수많은 변수가 교차하는 생물세계와 같은 영역이다.

한 5년 전쯤 일이다. 국책은행 성장금융 파트에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업계의 한 업체에 대한 투자 심사 과정에서 의견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경쟁사가 제시한 숫자가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하며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진심으로 그 숫자대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 업계에서 20여년을 종사하며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을 해왔기 때문이다. 현장의 질감과 그 경쟁사의 실제 역량, 산업의 진짜 돌아가는 판은 엑셀의 추정치와 달랐다. 하지만 국책은행은 화려한 숫자 등을 믿고 투자를 강행했다. 불과 몇 년 뒤 그 회사는 당초 제시했던 계획과는 달리 수익모델을 만들지 못했고, 후속 투자도 받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다.

이렇듯 재무 밸류에이션은 책상 위에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중장기적 현실과는 괴리를 보일 때가 많다. 오죽하면 오랜 세월 기업을 이끌어온 노련한 경영자일수록 경영을 일컬어 '운칠기삼(혹은 운칠복삼)'이라 말하겠는가. 현장의 맥락과 땀방울이 소거된 채, 숫자로 기업을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기업을 압박하는 행동주의는 자칫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

행동주의 일반의 명암: 학술 연구와 캘퍼스(CalPERS)의 전략 변경

글로벌 학계에서 주주행동주의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른 권위있는 논문들을 살펴보면, 이 현상이 결코 단선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행동주의의 순기능은 명확히 존재한다. 벱첵(Bebchuk) 등의 2015년 연구는 헤지펀드 행동주의가 단기적으로 주가만 띄운다는 비판을 반박하며, 개입 후 5년을 추적했을 때 기업의 ROA 등 경영성과와 주가가 장기적으로도 개선되거나 최소한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을 실증했다.

하지만 행동주의에도 공짜 점심은 없다. 간체프(Gantchev, 2013)의 연구에 따르면, 위임장 대결(Proxy Fight)까지 치닫는 행동주의 캠페인의 평균 비용은 약 1050만 달러에 달한다고 했다. 이 막대한 비용까지 감안하면 행동주의의 실제 경제적 순수익은 초기 예상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간체프 등의 2021년 연구는 소규모 지분으로 끊임없이 안건을 제안하는 이른바 '쇠파리(Gadflies)'들의 문제제기가, 오히려 이사회와 경영진의 귀중한 시간과 자원을 소모시키고, 경영 현안에 대한 집중도를 낮춰 기업 경영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여러 데이터로 증명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특히 이들 제안이 통과되어 실제로 이행될 경우 주주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반대로 정보력이 높은 주주 기반을 가진 기업에서는 저비용 행동주의가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행동주의의 성과는 그들 단독의 목소리 크기가 아니라 기관투자자 생태계라는 더 넓은 맥락에 의해 좌우된다. 즉 브라브(Brav) 등의 2021년 연구가 시사하듯, 행동주의 친화적인 타 기관투자자들이 해당 기업의 주주로 얼마나 많이 포진해 있느냐에 따라 개입의 성공 여부와 성과 개선 폭이 극명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복합적인 비용 구조와 대중영합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행동주의 역기능을 체감하고 방향을 선회한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다. 캘퍼스는 1987년부터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을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에 올려 대외에 공표해온 전형적인 부끄럼 전략(Name & Shame)을 구사해 왔다. 하지만 2010년 11월, 캘퍼스는 이 떠들썩한 명단 공개 전략을 전격 폐지하고, 그 대신 '비공개 관여(Private Engagement)'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 그 스탠스를 전환했다. 특정 기업의 문제점들을 공개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명성 훼손, 주가 변동성 심화, 내부 핵심 인력 이탈 등 장기적 측면에서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내부 연구 때문이다. 현재 캘퍼스는 관여 대상 기업 명단을 내부적으로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특정 대상 기업들에게는 추가 자금을 투입하여 우호적 대화를 통해 경영을 장기적으로 보정해 나가는 장기 동반자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영미식 발전 궤적의 맹목적 수용을 넘어

이러한 해외 선진 시장의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실증적 경험 등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전달한다. 우리는 지금 행동주의의 초기 단계에 진입하여 과거 영미권이 80~90년대 기업사냥꾼 시대에 겪었던 갈등과 혼란, 대중영합적 포퓰리즘을 뒤따라갈 개연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발전 궤적을 단선적이고(one size fits all), 기계적으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후발 주자의 가장 큰 이점은 앞선 이들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그것을 건너뛸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이 수십 년에 걸쳐 겪고 스스로 폐기했던 행동주의 부작용들을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행동주의의 진정한 순기능인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경영의 합리적 보정과 장기 가치 제고로 곧바로 직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론: 한국적 맥락과 우호적 관여

결론적으로, 누차 말했듯 한국의 주주행동주의는 우리의 고유한 맥락과 문화에 맞게 발전 진화해야 한다. 서양은 오랜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주고받는 토론과, 그것이 합리적이면 보정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왔지만, 한국 사회는 체면과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독특한 문화적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런 토양에서 공개적인 적대적 폭로전은 필연적으로 경영진의 무한 방어 본능을 자극하고, 그 과정에서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소모적인 진흙탕 싸움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무능하고 존경은 커녕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노골적 사익편취가 이뤄진 기업들에 대해서는 예외로 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행동주의의 기본적 발전 방향은 글로벌 선진 연기금들이 이미 안착시킨 '건설적이고 우호적인 관여(Amicable Engagement)'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최소 몇 년간 지분을 보유하며 기업과 함께 같은 배를 탄 장기적 파트너라는 신뢰를 먼저 심어주고, 최고 수준의 산업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비공개 대화(Confidentiality)를 통해 실질적인 진단과 솔루션을 제공하는 '컨설팅 투자(Consulting Investing)'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경영진을 무능하고 탈법적인 악당으로 몰아세우고, 단기적 주가 부양의 과실만 따먹고 떠나는 포퓰리즘적 행동주의는 자본시장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기업의 장기적 번영이라는 공동의 시간 지평(time frame) 아래에서, 숫자 너머의 경영 현실을 이해하고 기업과 '이해상합(相合)'을 이루려는 책임있는 행동주의야말로 코리아 프리미엄 시대로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촉매제가 될 것이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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