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기이한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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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의 '기이한 이중주'

등록 2026.03.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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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구조를 들여다보면 세계 어느 주요 연기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형적 설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 안건들에 대한 의결권 행사의 최종 판단을 전문 투자 조직인 기금운용본부가 아니라,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전위)'가 내리는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외견상 이해관계자 대표성과 외압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문성과 책임이 유리된 기이한 거버넌스일 뿐이다.

이 기형적 구조의 뿌리에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라는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기금운용본부 간부들이 구속되고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정부는 의결권 행사의 정치적 외압을 차단하겠다는 명분으로 그 결정권을 외부 위원회에 넘기는 고육지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처방이었다. 병의 원인이 '외압'이었다면 시스템의 투명성을 높여야 했음에도, 정부는 아예 주치의(전문가)에게서 수술 도구(결정권)를 빼앗아 외부인들로 채워진 회의체에 맡겨버린 셈이다.

의결권 행사는 투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핵심 행위이지, 투자와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행위가 아니다. 기업 분석에서 시작해 포트폴리오 편입, 경영진과의 대화, 그리고 주총에서의 찬반 표명까지는 하나의 유기적인 투자 프로세스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의결권만 떼어내 외부 위원회에 넘기는 것은, 의결권 행사로 인한 투자성과 책임은 투자 전문가에게 지우면서 권한은 엉뚱한 곳에 부여하는 꼴이다. 책임과 권한이 분리된 거버넌스는 필연적으로 책임 회피와 전문성 결여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글로벌 선진 연기금들은 의결권 결정의 '내부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 최대 연기금인 캘퍼스(CalPERS)가 대표적이다. 이사회가 거버넌스 및 지속가능성 원칙을 수립하면, 구체적인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는 내부 스튜어드십 팀과 투자팀이 전담한다. 이들은 공식 가이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의결권 결정을 독립적으로 내린다"고 명시한다. 여기서 외부 자문사의 권고는 참고 자료로만 활용될 뿐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는 내부 의사결정 구조에 '고도의 투명성'을 결합해 독립성을 유지해 나간다. NBIM은 연간 1만 개가 넘는 주총 안건을 외부 자문사의 도움을 받아 내부 책임투자 팀에서 결정한다. 특히 NBIM은 의결권 행사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주주총회 개최 5일 전(5 business days)'에 투표 방향성과 그 이유를 시장에 사전 공개한다. 외부의 눈치를 보기 위한 위원회 설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정보를 선제적이고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캐나다의 CPPIB와 네덜란드의 APG 역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내부 집행 체제를 갖추고 있다. CPPIB는 설립 목적에 '정치적 간섭 차단'을 명문화하고, 내부 투자팀이 독자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 네덜란드 ABP의 운용을 전담하는 APG 또한 내부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거버넌스 팀이 전 세계 투자 대상 기업에 대한 의결권을 조율한다. 이들에게도 외부 의결권 자문사는 정보의 제공자일 뿐, 의사결정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일본의 GPIF도 외부 운용사의 '내부 투자 전문가에 의한 결정'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공적 기금이 개별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GPIF는 의결권을 외부 위탁 운용사에게 전적으로 위임한다. 주목할 점은 이 경우에도 결정의 주체는 시민단체나 학계 인사가 섞인 위원회가 아니라, 자금을 실제로 운용하는 위탁 운용사 내부의 스튜어드십 전문가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글로벌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국민연금의 수전위 구조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구조다. 내부 전문가가 직접 행사하는 모델도, 위탁 운용사에게 위임하는 모델도 아니다. "중요 대상 기업에 대해 기금운용본부는 분석, 투자, 관여하고 수전위가 의결권을 결정한다"는 이원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렇다보니 의결권은 기업의 내부 상황을 가장 잘 알고, 동시에 장기 수익률을 추구하려는 전문가의 시각이 아닌 각 이해집단을 대표하는 위원들의 판단에 맡겨 진다.

이런 구조로 인해 기업과의 실질적인 대화(Engagement)가 형해화될 수 있다는 또 다른 문제점이 노정된다. 기금운용본부의 수책실 조직이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의제들을 논의해도, 마지막 '표'를 던지는 주체가 외부 위원회라면 기업은 본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이유가 없어 진다. 한편 내부 전문가가 전략적 판단하에 반대 의견을 내도, 위원회가 정치적 판단으로 찬성해버리면 기업은 투자 전문가가 아닌 위원회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 기형적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의결권 행사 권한을 다시 기금운용본부 내부로 가져와야 한다. 삼성물산 사태의 교훈은 전문가의 권한을 뺏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어떤 기준과 과정으로 판단했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권한 회수가 아니라 투명성 강화가 문제 해결의 본질이다.

노르웨이 NBIM 모델은 국민연금이 나아가야 할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내부 투자 전문가들에게 권한을 실어주되, 첫째 사전에 공표된 명확한 투표 원칙을 준수하고, 둘째 모든 안건에 대한 표결 방향과 사유를 주총 전후로 낱낱이 공개하며, 셋째 이사회와 집행부 간의 이해충돌을 감시하는 내부 통제 라인을 촘촘히 설계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의결권 행사는 투자와 유리된 별도의 행위가 아니다. 그 자체가 바로 투자행위다. 따라서 투자의 권한과 책임도 그 운용 주체인 기금운용본부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 책임은 지우고, 결정권은 별도 위원회로 돌리는 현재의 기형적인 설계는 바로잡아져야 한다. 전문가에게 권한을 주되 그 결정에 대한 판단은 시장에 맡기는 것, 이것이 글로벌 베스트 프랙티스 연기금들의 방식이다. 국민연금 의결권의 비정상적 행사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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