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카의 진정한 매력, 흐린 날씨와 만나다V8 엔진 포효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조화고성능 V 패밀리의 클래식 헤리티지 계승
애스턴마틴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007 시리즈죠. 시네필(영화광)에게 '007'이라는 단어를 던지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키워드가 몇 있는데요. 손목 위의 오메가 시계, 잔 속에 담긴 보드카 마티니(젓지 말고 흔들어서), 그리고 차고를 아름답게 채운 애스턴마틴. 그중에서도 DB5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동차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기관총과 사출 좌석 같은 첨단 장비를 품고 악당들을 따돌리던 애스턴마틴은 제임스 본드의 또 다른 페르소나와도 같습니다.
수십 년 동안 스크린 속에서 축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애스턴마틴을 '영국 신사의 품격'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죠. 하지만 영화 속 본드가 턱시도 안에 냉혹한 첩보원의 본능을 숨기고 있듯, 애스턴마틴 역시 우아한 디자인 아래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된 야성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만난 밴티지 로드스터 역시 피를 속일 수 없는 애스턴마틴입니다.
밴티지라는 이름에는 이미 애스턴마틴의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브랜드 라인업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모델명이 알파벳 'V'로 시작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밴티지(Vantage), 발할라(Valhalla), 발키리(Valkyrie), 뱅퀴시(Vanquish), 비라지(Virage), 밸러(Valour)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른바 'V 전통'은 1970년대 애스턴마틴이 고성능 V8 엔진을 얹은 밴티지 모델을 선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죠. 그런 의미에서 밴티지는 오늘날 애스턴마틴을 상징하는 V 패밀리의 시조이자 원조 격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컨버터블을 탈 때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강렬한 햇살 속을 달리는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선글라스를 끼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리쬐는 태양을 만끽하는 로망 말이죠. 하지만 냉혹한 우리나라 날씨에선 결코 쉽지 않은 풍경입니다. 30도에 달하는 여름날 볕이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는 정오에 탑을 열고 달리는 일은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자처하는 모습과 가깝습니다. 자외선 차단제를 아무리 덧발라도 에어컨 바람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태양의 기세에 결국 몇 분 지나지 않아 슬그머니 탑을 닫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죠.
운 좋게도(?) 이번 시승 날은 애스턴의 고향인 영국을 연상시키는 날씨였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간간이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차분한 분위기였습니다. 밴티지 로드스터의 진가는 바로 이런 날씨에 완벽하게 나오죠. 뜨거운 태양의 방해 없이, 오롯이 상쾌하고 서늘한 공기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입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늘 아래에서 밴티지 로드스터의 근육질 몸매와 고급스러운 도장면은 더욱 깊은 입체감을 뽐냈고, 이국적인 영국의 감성을 완벽하게 재현해냈습니다. 오픈카를 제대로 즐기려면 화창한 날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분위기 있는 흐린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이 녀석이 온몸으로 증명해보인 셈이죠.
세계 최고 수준의 순발력. 순식간에 열리는 하늘이 차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간 수많은 오픈카를 경험해 보았지만, 이토록 빨리 열리는 탑은 처음이었습니다(손으로 순식간에 열 수 있는 미아타는 제외하고요). 스위치를 누르면 약 6초 만에 탑이 완전히 열립니다. 보통 소프트탑 자동차들이 13초 내외, 하드탑 자동차는 20초가 넘게 걸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속도입니다. 시속 50km 이하로 주행 중일 때도 작동이 가능하니,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거나 터널 진입을 앞두고 있을 때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개폐 시간이 짧을수록 운전자는 탑을 여는 데 부담을 덜게 됩니다. '곧 신호가 바뀌는데', '잠깐 뒤에 다시 닫아야 할 것 같은데' 같은 고민이 눈녹듯 사라지죠. 덕분에 밴티지 로드스터를 타는 동안에는 하늘이 조금이라도 열릴 기미만 보이면 자연스럽게 스위치에 손이 갔습니다. 빨리 열린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장점인지,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태생부터 강력한 스포츠카이지만 도로에 나서면 예상외의 반전 매력이 먼저 마중나옵니다. 스포츠라는 이름이 주는 거친 긴장감 대신 대단히 여유롭고 느긋한 크루징 성능을 보여주기 때문인데요. 사실 애스턴마틴은 스포츠가 노멀 모드입니다. 보통의 고성능 차들은 스포츠 모드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엔진 회전수를 높게 쓰고 변속 충격을 주며 운전자를 다그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밴티지는 철저하게 다듬어진 전통적인 그랜드 투어러의 심성을 유지합니다. 가속 페달을 부드럽게 밟으면 엔진은 숨을 죽인 채 미끄러지듯 나아갑니다. 심지어 공회전에 가까운 회전수(1000rpm) 이하로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차체는 전혀 허둥대거나 헐떡이지 않고, 끈끈하고 묵직한 토크감을 바탕으로 우아하게 전진하죠. 이러한 세팅 덕분에 복잡한 도심 정체 구간이나 장거리 고속도로 주행에서도 운전자가 피로감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물론 신사의 모습이 이 차의 전부는 아닙니다. 스티어링 휠의 다이얼을 돌려 트랙 모드로 전환하는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로틀 반응은 한층 날카로워지고 서스펜션은 단단하게 조여집니다. 최근 고성능차들이 스피커를 통한 가상 배기음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밴티지 로드스터는 물리적인 배기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묵직한 V8 사운드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영국 신사의 수트 안에 감춰져 있던 맹수가 비로소 포효를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특히 소프트톱을 열어 둔 상태에서는 자극이 배가됩니다. 배기구를 빠져나온 저음의 굉음이 실내 스피커가 아닌 공기를 타고 직접 귓가를 파고들기 때문이죠. 가속 페달을 깊게 밟을 때마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V8의 포효는 온몸에 전율을 전달합니다. 터보 엔진 특유의 두터운 토크는 거대한 손이 등을 밀어붙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내고, 변속이 이뤄질 때마다 배기음은 짧고 굵은 폭죽처럼 터져 나옵니다. 운전자의 청각과 촉각, 감정까지 자극하는 경험. 뚜껑을 열고 달리는 밴티지 로드스터가 쿠페 모델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실내 인테리어와 기능 중에서 가장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던 부분은 바로 인테리어를 수려하게 둘러싼 가죽인데요. 푸른빛 같기도 하고 보랏빛 같기도 한 오묘한 색감이 차 안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사진으로는 쉽게 담기지 않는 색인데, 빛의 양과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부드럽고 촘촘한 가죽 질감까지 더해지니 운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애스턴마틴이 왜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로 불리는지 단번에 납득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시각적인 즐거움은 디지털 공간에서도 이어집니다. 드라이브 모드 설정 화면 가운데 '인디비주얼 모드'가 대표적입니다. 운전자의 취향에 맞게 엔진과 변속기, 서스펜션 세팅을 각각 조합할 수 있는 기능인데, 모드를 활성화하는 순간 센터 디스플레이와 계기판이 애스턴마틴의 상징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컬러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깊고 영롱한 녹색이 실내 조명과 어우러지며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단순한 설정 화면 하나도 감성적으로 연출하는 능력은 역시 애스턴마틴다웠습니다. 평소 시승차를 탈 때 인디비주얼 모드는 잘 쓰지 않는데, 애스턴에선 계속 손이 가더군요.
오픈카를 고민하는 소비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소음입니다. 소프트탑 특성상 풍절음과 외부 소음이 실내로 그대로 들어올 것만 같은 선입견이 있죠. 하지만 밴티지 로드스터는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비결은 여러 겹으로 구성된 두꺼운 탑 재질입니다. 도심 소음과 바람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실내는 고요해집니다. 고속도로에서도 로드스터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입니다. 물론 원래 어느 정도는 시끄러운 스포츠카라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동승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엔 충분합니다.
멋진 로드스터에도 옥에 티는 존재했습니다. 첫 번째는 계기판의 디지털 디자인입니다. 인디비주얼 컬러는 너무 예쁘지만, 외관의 수려함과 인테리어 가죽의 고급스러움에 비교하면 그래픽 테마와 시인성은 다소 평범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UI 디자인에 조금 더 신경을 써서 클래식한 감성을 더 투영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두 번째는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의 반사 문제입니다. 탑을 시원하게 열고 달릴 때, 직사광선이 실내로 들이치면 센터패시아에 위치한 인포테인먼트 화면이 빛 반사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디스플레이 각도만 살짝 조절하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하더군요.
밴티지 로드스터는 숫자와 기록을 겨루는 디지털 시대의 슈퍼카와는 결이 다릅니다. 평소에는 영국 신사처럼 우아하고 여유롭게 도심을 누비다가도, 운전자가 원할 때면 야수로 돌변해 거침없는 V8 사운드를 토해냅니다. 그 이면에는 애스턴마틴이라는 브랜드가 쌓아온 모터스포츠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애스턴마틴은 오늘날 F1과 르망 24시 하이퍼카 클래스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 동시에 경쟁하는 몇 안 되는 브랜드죠. 밴티지 로드스터는 애스턴의 레이싱 DNA를 가장 감성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완 도어를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소한 아쉬움은 금세 잊혀집니다. 머리 위로 펼쳐지는 하늘과 귓가를 울리는 배기음, 운전자 감각을 깨우는 우아한 주행 감성이 빈자리를 채우죠. 제임스 본드의 자동차로 사랑받아온 이유, 그리고 애스턴마틴이 지금도 F1과 르망 무대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를 이 차는 굳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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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권지용 기자
senna@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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