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개봉 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JTBC 드라마 ‘밀회’ 촬영이 워낙 ‘팍팍’해 급하게 인터뷰 일정이 정리됐다. “여기까지 오시게 해 죄송하다”며 미안해했다. ‘미안하다’는 목소리에서 조차 기품이 느껴졌다. ‘우아함’ ‘품격’ 등의 단어를 써가며 화답했다. 그는 “그냥 일어날까요?”라며 농담을 던졌다. 그 농담마저도 참 ‘김희애’스러웠다. 이제 ‘김희애’란 이름은 하나의 고유 형용사가 됐다.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요. 무안하게(웃음). 글쎄요.(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구력은 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를 하면 끝까지 또 열심히 하려고 해요. 뭐 누구는 그렇게 안 하나. 우리 다 그렇게 살잖아요. 난 그냥 배우가 내 직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직장을 잘 다니기 위해 관리도 좀 하고, 화장도 수없이 했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대중이 날 그렇게 봐주는 것 같아요. 김희애스럽다? 낯간지럽다. 에이.”
엄살 같은 얘기다. 하지만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표정,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 영락없는 ‘김희애’스러움이다. 솔직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우아한 거짓말’에 출연한다는 보도 역시 정말 설명 불가능한 느낌이었다. 1993년 ‘101번째 프러포즈’ 이후 21년만의 스크린 컴백이다. 우선 역할이 ‘엄마’로서 선뜻 하기 힘든 캐릭터다. 딸을 먼저 보낸 엄마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다 보니 솔직히 너무 센 얘기는 불편해요. 볼 용기도 없어요. 그런데 ‘완득이’를 만든 이한 감독님이 연출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죠. ‘완득이’의 감성이라면 ‘우아한 거짓말’도 그렇게 힘든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상에서도 다행스럽게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이 들어 있었죠. 결과적으로 감독님이 너무 잘 풀어주셨어요.”
잘 풀어냈다고 편안했다고 칭찬을 했지만 정작 시사회에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불편해서? 혹은 마음에 안 들어서? 둘 다 아니었다. 그냥 단순하게 ‘후폭풍’이란다. 민망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끄러워했다. “난 왜 내 연기를 보면 그렇게 부끄러운지”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일 모레 50세를 바라보는 이 여배우의 옆태가 정말 고와 보였다. 미모를 칭찬하자 “이 와중에도 참나”라며 장난을 친다.
“난 지금도 모니터를 두 번을 못해요. 사실 한 번도 억지로 봐요. 내 연기를 보면 객관화가 잘 안 되요. 그래서 내 연기가 아닌 내 주변의 연기를 잘 봐요. 아마 시사회 날도 그랬을 거에요. 이 어린 친구들 연기를 보는데 갑자기 너무 감동이 밀려오는 거에요. ‘그러게 너나 잘하지 애들은 이렇게 잘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그런 연기들을 하는 저 어린 친구들을 보니 그냥 말 못할 감동이 확 밀려왔어요. 영화 보며 울어야 할 게 후폭풍으로 온 거죠. 아이고 주책이야.”
그는 연신 자신과 함께 한 고아성 김유정 김향기 등 어린 후배들을 칭찬했다. 딸이 없이 두 아들만 키우는 김희애는 ‘딸이 있었으면’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 속에서 애틋한 연기를 펼쳤다. 아니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털털함을 보였다. 사실 그 털털함은 막내딸을 먼저 보낸 엄마의 슬픔을 감추기 위한 ‘우아한 거짓말’이었다. 김희애는 잠시 눈물이 고이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이런 영화, 아니 이런 얘기 누가 좋아하겠어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얘기잖아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아픔은 그 어떤 걸로도 표현하기 힘들 거에요. 하지만 이 여인에겐 또 다른 딸이 남아 있잖아요. 우리가 어떤 큰 슬픔을 맞이해도 24시간 1분 1초가 매일 슬픈 것은 아니잖아요. 문득 잊어버리는 순간, 그 순간이 이어지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이랄까. 그 과정을 말하는 게 이번 영화 ‘우아한 거짓말’이에요.”
‘우아한 거짓말’이 슬픔으로만 가득찬 영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출을 맡은 이한 감독 전작 ‘완득이’의 주인공 유아인이 파격 조연으로 등장한다. 극중 이름도 인상적(?)이다. 이 감독과의 인연으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김희애는 유아인 얘기에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조만간 JTBC 드라마 ‘밀회’에서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출연한다.
“나 솔직히 유아인이 고등학생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20대 중반이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배우가 망가지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유아인은 그걸 하더라구요. 더 놀란게 그게 어울린단 거에요. 드라마에선 천재 피아니스트인데, 영화에선 완전 망가진 역할로 180도가 바뀌어서 오더라구요. 그냥 역할에 빠져 버려요. 내가 선배지만 정말 많이 배웠고 자극도 됐고요. 정말 유아인, 대단한 배우에요.”
김희애는 데뷔 31년을 맞이하는 동안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믿음’을 꼽았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에게 보답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고. 지금도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준 방송작가 김수현을 많이 의지한단다.
“‘아들과 딸’ 이후에는 그냥 무조건 ‘후남이’ 같은 역할만 들어왔어요. 그런데 김수현 선생님이 ‘내 남자의 여자’에 나를 선택해 주셨죠. 내가 그런 팜므파탈이 가능할까 했죠. 그런데 이제는 또 그런 역할만 계속 와요.(웃음). 난 그래요. 나를 설득하고 내가 믿음을 갖게 도와주는 분들과 일할 때가 가장 즐거워요. 이번 ‘우아한 거짓말’도 비슷한 경험을 했죠.”
인터뷰가 끝난 뒤 악수와 함께 90도로 인사를 해왔다. 여배우 김희애가 30년 동안 ‘우아함’을 잃지 않고 여배우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은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내 김희애, 엄마 김희애, 여배우 김희애.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김희애를 대체하긴 힘들 것 같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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