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극장가 한국영화 ‘빅4’ 가운데 ‘베테랑’은 최고의 오락 영화란 점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 중심에는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이 있었기에 이런 주목이 가능했다. 그는 ‘액션 키드’란 말에 “대체 나이가 몇인데 ‘키드’냐”며 웃는다. 걸출한 흥행작과 화제작을 쏟아낸 류 감독이지만 이번 ‘베테랑’은 이상스럽게도 긴장감이 끊어지지 않는단다.
“‘베를린’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더군다나 베를린은 100억짜리 영화잖아요. ‘베테랑’은 그것에 비하면 작아요. 하하하. ‘베를린’ 때는 내가 몰랐던 얘기였고, 그 안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상황과 얘기를 맞춰 나가는 작업을 했죠. 스트레스가 정말 많았어요. 좀 즐기면서 할 수는 없을까. 내가 온전히 알고 있고, 내가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 그게 ‘베테랑’의 시작이었어요.”
이견이 없는 충무로 최고 스타 감독 중 한 명으로 류승완을 꼽아도 누구 하나 변명할 이유를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긴장감은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뛰어 넘은 떨림이란다. 매번 작품을 잉태할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이런 긴장을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주머니에서 배춧잎 한 장 꺼내 없는 시간 쪼개서 극장 찾으시는 분들에게 재미를 드리지 못하면 안 된단 강박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영화는 그런 강박에선 좀 벗어나서 만들었다고 할까. 우선은 스태프들의 만족도 높고, 배우들의 평도 좋아요. 유해진 선배는 ‘부당거래때의 느낌이랑 똑같다’고 하시고, 유아인은 주변에서 욕을 정말 많이 먹어요. 하하하. 되게 좋아해요(웃음). 정민 선배도 당연히 너무 잘해주시고 중심을 잡아주셔서 고맙고.”
류 감독은 이번 영화의 히든카드이자 특별한 고마움으로 유아인를 꼽았다. ‘베테랑’ 속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는 한국 장르 영화 속에서 다시없을 악역 중의 악역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안하무인의 극치는 사실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한다고 해도 거부감이 들 정도다. 더욱이 유아인이란 특유의 반항아 기질 가득한 배우가 처음 이 역을 맡는다고 했을 때 우려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정말 너무 고맙고 만족감 200%에요. 제 영화를 보면 항상 악역들의 존재감이 극 전체의 맛을 살려냈어요.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정재영, ‘짝패’의 이범수, ‘부당거래’ ‘베를린’의 류승범 등이죠. 사실 ‘베테랑’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시도나 해보잔 생각으로 몇몇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건냈는데 당연히 거부 의사가 왔죠. 그때 유아인이 자신의 소년성을 벗고 싶단 얘기를 얼핏 듣고 ‘믿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전했는데 덥석 하겠단 얘기가 돌아왔어요. 만세를 불렀죠. 하하하.”
하지만 그 ‘만세’가 ‘아이쿠’로 바뀌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다. 유아인의 합류 선언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했지만 잠시 생각에 빠지자 덜컥 겁이 났다고. 유아인의 출연작을 하나 둘 찾아서 봤단다. 류 감독은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세를 불렀을까’라며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고.
“유아인은 그동안 반항아 역을 많이 했지만 항상 우리에게 응원을 받는 캐릭터였어요. ‘완득이’ ‘깡철이’를 보면 아시잖아요. 그런데 ‘조태오’는 ‘쳐 죽일 놈’이에요. 유아인에게서 내가 어떻게 그런 모습을 끄집어 내지? 이 생각이 들자 정말 막막해지는 거에요. 하하하.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이 생각에 시름만 늘어갔죠. 근데 그 생각도 얼마 안 갖어요. 유아인 정말 대단한 배우에요.”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유아인은 그냥 ‘조태오’가 돼 있었다. 류 감독이 밝힌 유아인에 대한 촬영장 뒷얘기다. 훈내 진동하는 그의 모습에 여자 스태프들은 눈에 하트를 그리며 유아인의 등장만을 매일 기다렸단다. 하지만 촬영 초기 어떤 장면를 촬영한 뒤 모든 스태프의 눈에 유아인은 ‘조태오’가 돼 있었다고. 그 장면 이후 류 감독도 ‘됐다’란 생각이 들었단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화물차 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기사의 아들을 강압적으로 다루는 연기에서 소름이 끼치더라구요. 그 장면 촬영 뒤 여자 스태프들이 유아인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어요. 경멸의 눈빛? 하하하. 저도 그 장면 촬영 뒤 ‘됐다’란 확신이 들었죠. 다른 모든 선배들의 극찬이 유아인에게 집중됐어요. 저런 배우, 정말 흔치 않아요. 이번에 함께하게 된 것 너무 감사해요.”
류 감독의 감사는 비단 유아인에게만 집중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 속 보이지 않는 공로자들인 스턴트팀을 유독 아끼는 감독으로 류승완은 유명하다. 그의 단짝 정두홍 무술 감독과는 ‘짝패’에서 함께 주인공으로 열연까지 펼쳤다. 류 감독의 작품 거의 모두에 정두홍 감독이 참여했다. 스턴트팀 얘기에 류 감독은 다소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제작보고회에서도 언급했지만 내 영화 인생 중 가장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어요. 영화 속에서 오토바이 스턴트 두 장면이 나오는 데 두 번째 장면을 찍던 친구가 잘못하면 죽을 뻔 했었죠. 영화 초반 차고에서 남성의 중요 부위를 공격당하는 연기를 펼치는 친구가 그 주인공이에요. 사실 오토바이 스턴트는 정두홍 감독도 난색을 표한 장면이에요. 제가 좀 무리하게 밀어붙였죠. 찰나의 순간에 ‘합’이 틀어지면서 굉장히 둔탁한 소리가 났어요. 저도 겁이 턱 났죠.”
당시 사고를 얘기하면서 류 감독은 본능적으로 정 감독을 쳐다봤단다. 사고가 일어나면 정 감독 특유의 몸짓이 있다고. 과거 현장에서 선배 몇 분을 잃은 트라우마에 정 감독은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떨고 있더란다. 그 모습에 류 감독도 ‘큰 사고’ 임을 직감했다고. 머리 속이 하얗게 지워진 채 그날 촬영을 접었다.
“정말 이런 사고가 생길 때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란 자책을 해요. 당시 장면도 내가 고집을 피웠는데 정두홍 감독이 평소 안쓰던 호칭까지 쓰면서 말리더라구요. 내가 밀어붙였어요. 결국 사고가 났고, 스턴트맨의 턱이 박살이 났어요. 촬영 다 접고 병원으로 달려갔죠. 그 친구의 얼굴을 보는 데 눈물이 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친구가 오히려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거에요. 그때 다짐했죠. 이 영화 진짜 잘 만들어야겠다고.”
류 감독의 가슴을 쓸어내린 오토바이 액션 장면은 결국 CG하나 없는 실제 촬영으로 영화에 삽입됐다. 눈을 의심케 하는 액션 장면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다. 영화 속 곳곳에 배치된 액션 장면은 류승완의 장기가 아닌 그의 눌려진 스트레스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이런 영화를 찍는 감독이 류승완 이외에 또 누가 있을까란 뻔한 의문형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다.
“아이고 아니에요. 전 그저 제가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능력 부족의 감독이에요. 하하하. 마지막 서도철(황정민)과 조태오(유아인)의 막싸움 장면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시더라구요. 명동 한 복판에서의 개싸움? 하하하. 제가 한 동안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을 폐쇄 공간에서 마무리하던 경향이 있었어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그런 처리를 했는데 이번에는 좀 뭐랄까. 축제 분위기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죠. 지금까지의 액션 마무리에 대한 갈증 해소 정도. 영화 ‘베테랑’의 전체적인 톤 앤 매너와도 딱 맞는 적절한 느낌 같았구요. 아무튼 참 즐겁게 찍은 작품이에요.”
류승완에겐 항상 어떤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만든 ‘베테랑’의 폭발성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언제나 그는 ‘충무로 액션 키드’로서 관객들의 가슴을 뛰고 설레게 하고 또 그렇게 만들고 싶어한다.
“지금의 그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내 방식이 성장인지 퇴화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내가 좋아서 하는 선택이니깐 전 내 방식 대로 만드는 게 좋은 거죠. 그런 말이 있잖아요. 좋은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좋은 감독도 마찬가지 같아요. 어려운 얘기도 통쾌하고 즐겁게 공유할 수 있는 얘기로 만드는 능력. 지금도 부족한 거 같은데 계속 수양해야죠. 하하하.”
P.S 첫 번째, 영화 속 주인공 서도철 역의 황정민이 촬영 중 진심으로 짜증난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다는 류승완 감독, 류 감독은 “그 장면이 어디에 있는지 잘 찾아봐라”면서 “황정민 스스로도 그 장면을 찍으면서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고 하더라”고 웃는다. 두 번째, 연기하는 감독으로 유명한 류승완, 앞으로 연기는? 류 감독은 “나 말고도 연기 잘하는 배우가 얼마나 많은 데”라며 손사래다. 세 번째, 정두홍 감독의 배우 캐스팅은? “나이 쉰이 넘은 노인네다(웃음). 내가 언제까지 만들어 줘야 하나”라며 농담이다. 정 감독이 서운해 하면? “그 형도 내 의사를 존중할 것이다”고 웃는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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