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기업회생절차 폐지 결정 해운 불황 ·치킨 게임 못 버텨 일부 자산·인력, 현대상선·SM상선에 승계·매각
서울중앙지법 파산6부(재판장 김정만)는 2일 한진해운에 대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폐지를 결정했다. 재판부는 채권자 의견 조회 등 2주간의 항고기간을 거친 후 오는 17일 한진해운 파산 선고를 내릴 예정이다.
한진해운은 우리나라 원양 해운업의 시초로 ‘수출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꼽혔다. 한 때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로 군림했지만 글로벌 해운업 장기 불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설립한 한진해운은 출범 이듬해인 1978년 중동항로를 개척하고 1979년 북미서안 항고, 1983년에는 북미동안항로 등을 개설하며 한국 컨테이너 해운업을 이끌었다.
1986년 불황과 적자 누적으로 인해 위기를 겪었지만 조중훈 회장이 경영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다.
1988년엔 1940년대 설립된 국내 1호 선사인 대한상선(대한선주)를 인수해 종합해운 기업의 위치에 올랐다. 1992년 국내 최초로 4000TEU(1TEU는 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인 '한진오사카호'를 띄웠으며 국적선사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미국 시애틀과 롱비치 등 주요 항만에 전용 터미널을 세워 사세를 키웠으며 1995년 거양해운을 인수, 유럽~중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7년 독일 2위 선사 DSR-Senator도 인수했다.
2002년 11월 조중훈 회장이 타계한 후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이 한진해운 경영에 나섰다.
2003년 중국 코스코, 대만 양밍, 일본 K-Line과의 얼라이언스 결성으로 글로벌 컨테이너선사로 자리매김했다. 해운업이 호황이었던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한진해운은 5370TEU급의 컨테이너를 잇따라 인수하며 규모 키우기에 나섰다.
2006년 조수호 회장이 별세한 이후 경영 경험이 전무한 부인 최은영 회장이 직접 경영에 나서면서 경영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한 때 최 회장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해운업계에선 최 회장이 방향키를 잡은 시기부터 한진해운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은 2007년부터 2014년까지 한진해운을 경영했다. 2009년 최 회장은 해운업 전문가가 아닌 금융권 출신 김영민 부사장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최 회장과 김 사장은 향후 해운업을 낙관적으로 전망, 2010~2011년 호황기를 대비하겠다는 목적으로 당시 시세보다 5배나 비싼 가격을 주고 10년 이상 장기 용선료 계약을 맺었다.
한진해운의 영업실적은 최 회장의 전망이 빗나가면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각각 5219억원, 1098억원, 4123억원읭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영업손실이 지속됐으나 비싸게 계약한 용선료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감에 따라 재무구조는 개선되지 못했다.
결국 2014년 최은영 전 회장은 시아주버니인 조양회 한진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이후 조 회장은 한진해운 경영 정상화를 위해 대한항공 등 그룹 주력 계열사 1조2000억원대의 자금을 수혈했다. 알짜 자산인 에쓰오일 지분도 매각하며 한진해운 살리기에 나섰다.
조 회장의 노력과 글로벌 해운업이 호황을 보이며 한진해운의 2014년 영업이익은 240억원으로 흑자 전환됐다. 2015년에는 369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비싼 용선료로 인해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2015년 한진해운의 부채는 5조6000억원에 달했다.
결국 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자율협약(채권단 공동관리)을 신청했다. 하지만 채권단의 자구책 요구를 충족하지 못해 자금 지원이 중단됐고 9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법정관리 이후 세계 곳곳의 바다를 누비던 한진해운 선박의 운항은 중단됐고 일부 항만에서 선박이 압류되는 등 ‘물류대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해당 기간 동안 40년간 쌓아온 네트워크가 무너졌으며 인력과 주요 자산은 현대상선과 SM상선 등에 승계되거나 매각됐다.
뉴스웨이 임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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