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성과 없으면 미련도 없다"··· 구광모의 LG, 칼 같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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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없으면 미련도 없다"··· 구광모의 LG, 칼 같은 인사

등록 2025.11.28 07:04

차재서

  기자

'실적 부진' LG전자·화학 대표 새 얼굴로 그룹 부회장단도 권영수 1인 체제 재편'혁신'과 '신상필벌' 총수 메시지 재확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2025년 신년사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LG 제공구광모 LG그룹 회장이 2025년 신년사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LG 제공

구광모 LG 회장이 몰고 온 '인사태풍'은 매서웠다. 부진에 시달린 핵심 계열사 LG전자와 화학 CEO가 나란히 교체되고, 그룹 총수 아래 단 한 명의 부회장을 두는 지배구조의 대수술이 이뤄졌다.

재계에서는 지난 한 달 계열사 사업보고회를 주재하며 조직을 세심하게 뜯어본 구광모 회장이 내부에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고 해석한다. 수년간 추진해 온 체질·구조 전환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 아래, 본업 경쟁력에 집중하고 시행착오를 돌아보며 초심을 회복하라고 주문했다는 분석이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LG 계열사는 전날 각각 이사회를 거쳐 정기 임원 인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LG전자의 새 대표가 류재철 HS사업본부장(사장)으로 바뀌고, LG화학에선 김동춘 첨단소재사업본부장이 CEO로 발탁됐다.

반도체 기판으로 LG이노텍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문혁수 CEO와 전장 사업을 이끈 은석현 VS사업본부장(LG전자), 냉난방공조 전문가 이재성 ES사업본부장(LG전자)도 각각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장으로 승진했다.

권봉석 LG 부회장 사진=뉴스웨이 DB권봉석 LG 부회장 사진=뉴스웨이 DB

홀로 남은 권봉석···'1인 부회장' 시스템의 명암



LG 임원 인사에서 '이변 아닌 이변'으로 꼽히는 대목은 올해도 부회장 승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1순위 후보로 거론된 조주완 LG전자 CEO는 임기 만료(2027년 3월)를 1년 이상 남기고 중도 하차했고, 흑자 전환을 일궈낸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도 지금의 자리를 지키는 데 그쳤다.

오히려 부회장 수는 줄었다.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신학철 LG화학 부회장마저 용퇴를 선언하면서 LG는 구광모 회장과 권봉석 부회장 '2인 체제'로 바뀌었다. ㈜LG 외에 모든 계열사의 부회장직을 없애고 지주사 중심의 지배구조를 형성했다.

부회장이 6명에 달했던 과거의 구조나 후보군의 면면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조처다. 시장에선 LG가 올해 부회장 숫자를 늘릴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구광모 체제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천문학적 자금이 오가는 글로벌 프로젝트도 속속 성사되는 만큼 '타이틀'을 걸고 사업을 책임질 인물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다.

그룹 내 경영에 참여하는 오너가(家) 일원이 구 회장 한 명뿐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LG의 부회장 수는 절대적으로 작다. 삼성의 경우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 등 3명이, SK에선 오너일가 외에 네 명(유정준·서진우·장동현·이형희)의 부회장이 활동하고 있다.

부회장은 그룹 회장의 부담을 분산시키고 전략·인사·투자 등의 의사결정 체계를 속도감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조정자로 통한다. 대외 협상력과 시장 신뢰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총수가 잦은 대외 활동으로 전략·인사·투자·신사업을 모두 챙기기 어렵다면 여러 명의 부회장을 두고 분야별로 중재토록 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구 회장의 판단은 달랐다. 2018년 취임 이후 기존 인사가 물러날 때마다 순차적으로 숫자를 줄여나갔고 8년차를 맞은 올해 단 한 명의 부회장만을 남겼다.

재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구 회장이 선택한 '1부회장 체제'가 지휘부를 슬림화하고 계열사의 자율성을 높여 성과 창출을 유도할 것이란 장밋빛 전망 이면엔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우려도 뒤따른다.

유익한 측면은 있다. 그룹 의사결정 라인을 단순화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함으로써 각 계열사 CEO가 성과로 말하는 조직문화를 정착시킨다는 점이다. 지주사가 전략·인사·투자를 통일된 체계로 관리하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인의 부회장에게 전략 조율과 대외 협상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은 부담 요인으로 지목된다. 자칫 의사결정이 늘어질 뿐 아니라, 각기 다른 계열사 CEO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모으지 못한다면 충돌이 생기는 탓이다. LG처럼 전자부터 디스플레이, 부품사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에선 어느 곳보다 중재자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 있다. 부회장의 퇴진으로 쌓여 있는 노하우가 빠르게 사라지는 '경험의 단절'도 위험 요인 중 하나다.

LG전자 조주완 CEO가 5일(현지시간) IFA 2025 LG전자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LG전자 제공LG전자 조주완 CEO가 5일(현지시간) IFA 2025 LG전자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LG전자 제공

부진한 CEO 과감히 교체···신상필벌 원칙 재확인


'신상필벌'이라는 구 회장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평판이 좋더라도 실적이 미흡하다면 과감히 선을 긋고, 성과로 실력을 입증한 인물에겐 중책을 맡기는 인사 기조가 계열사 곳곳에서 포착됐다.

문혁수 LG이노텍 CEO의 사장 승진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3년 부사장 신분으로 최고경영자에 오른 뒤 전장·반도체 기판 등 고부가 사업을 집중 육성하고 회사의 체질을 180도 바꾼 만큼 합당한 평가가 이뤄졌다는 의견이 앞선다.

LG이노텍의 성장 흐름도 뚜렸다. 3분기에만 2037억원을 내며 전년 대비 56% 성장했고, 로봇·드론·우주산업용 부품 등 신사업 영역으로 발빠르게 저변을 넓히고 있다. 스마트 팩토리 구축, 차세대 로봇용 부품 개발을 위해 각 영역의 선두주자인 인텔, 보스턴다이내믹스 등과도 손을 잡았다.

김동춘 LG화학 사장은 부사장(첨단소재사업본부장)으로 승진한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한 계단 올라섰다. 첨단소재 사업의 고수익화, 미래 성장동력 발굴, 글로벌 거래처 발굴 등으로 경쟁력 강화에 일조한 그간의 성과가 CEO '깜짝 발탁'으로 이어졌다. LG화학과 ㈜LG에서의 경영전략과 신사업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 사업 감각에 전략적 통찰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라고 회사 측은 소개했다.

부회장 승진 소식은 없었지만, 정철동 LG디스플레이 사장 역시 그룹의 재신임을 받는 데 성공했다. 2023년 12월 구원투수로 등판한 그는 5000억원대 적자를 내던 회사를 불과 2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돌려놨다. 경영 효율화와 OLED 기술 투자를 병행한 사업가적 안목이 회사를 장기 침체의 늪에서 건진 원동력이다. LG디스플레이는 3분기까지 누적 매출 18조6092억원에 영업이익 3485억원을 냈고, 이변이 없는 한 4년 만의 연간 흑자 달성도 유력하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도 임기를 이어간다. 전기차 캐즘에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한국인 근로자 체포·구금 사태 등 다사다단한 한 해가 계속됐지만, ESS(에너지저장장치)로 기회를 모색하며 성과를 창출한 게 주효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1분기 3747억원 ▲2분기 4922억원 ▲3분기 6013억원 등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보조금을 포함한 수치라고는 하나, 국내 배터리 3사 중 이익을 내는 곳은 이 회사가 유일하다. 김동명 사장은 미국 공장 사태 때도 현지로 달려가 당국과 소통하며 수습에 만전을 기했다.

반면 조주완 LG전자 사장과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올해를 끝으로 LG 계열사 CEO로서의 행보를 마무리했다. 수요 위축과 관세 리스크 등 대내외 불확실성 속에서도 선전했지만, 현 체제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감지된다.

LG전자는 분기마다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일으키면서도 영업수익 측면에선 두 자릿수 넘게 뒷걸음질 쳤다. 2분기엔 전년 대비 반토막 난 성적표(영업이익 6394억원)를 제시했다. 관세와 희망퇴직 등 일회성 비용도 무시할 수 없지만, 투자와 마케팅 부담이 겹친 탓에 일부 신사업이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영향도 크다. 일례로 MS(미디어엔터테인먼트)사업본부는 3분기 매출이 9.5% 줄고, 3000억원을 웃도는 영업손실도 냈다. 냉난방공조 사업은 매출을 1.1% 높이는 데 그쳤고, 영업이익은 15% 줄었다. 성장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히는데, 이들 사업을 지휘한 조 사장에게 책임이 돌아간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LG화학은 캐시카우였던 석유화학의 부진에 발목을 잡혔다. 중국발(發) 공급 과잉에 따른 수급 불균형이 계속되면서다. 석유화학부문은 지난 3분기(영업이익 291억원)처럼 시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흑자를 낸 적도 있지만 2023년 이래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올해 누적 손실도 1100억원을 웃돈다. 그 여파에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LG화학의 신용등급을 'Baa1'에서 'Baa2'로 하향했다. 배터리·첨단소재 등으로의 체질 개선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기대하긴 이르다.

구 회장도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LG화학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신학철 부회장이 구 회장의 첫 번째 영입 인사이자 순혈주의를 깨고 6년간 그룹에서 버팀목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배경도 재조명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과 '혁신'···인사에 담긴 구광모의 진짜 메시지



LG 안팎에선 구 회장이 파격적인 사장단 인사를 통해 자신의 경영철학을 조직에 다시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구 회장은 연초부터 지속 가능한 성장과 변화,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공유해왔다.

신년사에선 '차별적 가치'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당시 구 회장은 "LG의 도전은 과감한 혁신으로 이어지며 다양한 영역에서 최초·최고의 역사를 만들었다"면서 "도전과 변화의 DNA로 기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9월 사장단 회의에서도 같은 기조가 이어졌다. 구 회장은 "구조적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는 인식에 사업의 선택과 집중, 위닝 R&D, 구조적 수익 체질 개선 등을 논의해왔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언급했다. 발언 이후 일각에선 사업 부진에 대한 경고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대대적 쇄신의 예고편이었던 셈이 됐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구 회장의 앞선 메시지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성과 중심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한편, 혁신을 향한 체질 개선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경고를 실질적 조치로 보여준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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