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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돋보인 위기 속 리더십

[이건희 회장 별세]“한국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돋보인 위기 속 리더십

등록 2020.10.25 13:09

이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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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취임 당시 ‘초일류 기업’ 성장 약속신경영 선언 후 연평균 17% 성장률 보여

그래픽=박혜수 기자그래픽=박혜수 기자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과 더불어 선언된 약속은 당시 사람들에게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으나 이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10조원이 채 못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386조원을 넘기면서 39배 늘어났고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커졌다.

◆반도체·휴대폰 신화···IT 강국 선도

삼성이 IT 산업의 모태인 반도체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도 삼성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974년 당시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라는 비판이 지속되며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반대했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생각은 달랐다.

당시 그는 “언제까지 그들(미국, 일본)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라고 밝히며 한국반도체 인수를 밀어부쳤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반도체의 성공 이후 ‘애니콜 신화’가 이어졌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그는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고 앞서 나갈 것을 촉구했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이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21세기 초일류 기업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또 한 번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를 삼성 디지털 경영의 원년으로 선언하고,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업구조, 경영 관점과 시스템, 조직 문화 등 경영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힘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전략과 기회를 선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0년 5월 16라인 반도체 기공식. 사진=삼성전자 제공2010년 5월 16라인 반도체 기공식. 사진=삼성전자 제공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성장 이끈 신경영

1992년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 반도체가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 회장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같은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 회장에게도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고 이후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이 나왔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에 가입한 1996년, 삼성은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이건희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고 채찍질하며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쳤으며 위기에 미리 대비한 삼성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생산량에서 품질, 디자인으로 도전 지속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언하고 디자인 경쟁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는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하자”고 격려했다.

이후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000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 후에도 이 회장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2005년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 명품과 디자인의 격전지인 밀라노에 주요 사장들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다시 한번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밀라노 4대 디자인 전략’도 발표했다. 독창적 디자인과 UI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으로 1996년에 이은 ‘제2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

이듬해 출시된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는 2006년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며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뒤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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