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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통신사업 일으킨 최종현 선대회장···'정공법'으로 특혜설 정면 돌파

SK 통신사업 일으킨 최종현 선대회장···'정공법'으로 특혜설 정면 돌파

등록 2022.08.27 07:00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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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30년전 억울한 오해로 이동통신사업권 두 번 포기...불이익만 받아특혜시비 불가능한 '한국이동통신 지분 공개·고가 매입', 통신사업 진출통신사업 진출 이후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등 통신강국 기반 조성

1992년 8월 27일 제2이동전화 사업권 반납 기자회견 장면. 사진=SK그룹 제공1992년 8월 27일 제2이동전화 사업권 반납 기자회견 장면. 사진=SK그룹 제공

SK 성장을 일으켜세운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24주기를 맞아 30년 전 통신사업을 끌어안게 된 시대적 배경이 재계에서 재조명받고 있다.

27일 재계 및 SK그룹에 따르면 SK 역사에서 1992년 8월 27일은 가장 억울한 날로 기억된다. 정확히 30년 전이던 이날 SK는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반납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인 절차와 공정한 평가를 거쳐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 총화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손 사장은 기자회견 도중에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물을 보였다.

기자회견을 갖기 1주일 전 SK는 제2이통사업자로 선정되면서 재계의 이목을 끌었다. 체신부는 1992년 4월 정부 중심의 이동통신 시장에 민간사업자를 참여시켜 시장 경쟁력을 높이고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선경 상호를 쓴 SK와 포항제철, 코오롱, 동양, 쌍용, 동부 등 6개 그룹이 컨소시엄을 결성해 경쟁에 참여했고 그 해 8월 SK가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SK는 1만점 만점에 8388점을 얻어 2위 포항제철(7496점), 3위 코오롱(7099점)과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했다. 통신업계는 당시 SK가 경쟁기업보다 일찌감치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기 때문에 1위 선정은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1994년 2월 15일 한국이동통신 입찰 참가 장면. 사진=SK그룹 제공1994년 2월 15일 한국이동통신 입찰 참가 장면. 사진=SK그룹 제공

◆SK, 통신사업 진출에 10년 공들여 = 최종현 SK선대회장(이하 선대회장)은 1980년 11월 대한석유공사 인수 이후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할 주력사업으로 정보통신을 주목했다. 미국과 유럽이 당시 정보통신을 성장동력으로 삼고 시장을 확장하는 흐름을 눈 여겨 보다가 1984년 선경 미주 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조직하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이 팀은 미국에서 별도 법인을 설립해 통신사업을 벌였고 1991년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선경텔레콤(1992년 대한텔레콤으로 변경)을 세우며 통신사업 경험을 착실히 쌓았다.

SK는 이처럼 10년 가량 '축적의 시간' 덕분에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로 선정됐다. 선대회장도 "연구개발을 강화해 이동통신 기술의 조기자립과 경쟁력 확보에 힘을 쓰면서 통신강국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선대회장의 꿈은 정치권 정쟁으로 무산됐다. SK가 선정되자 대통령 선거를 앞 둔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과의 사돈 관계를 거론하며 SK의 사업권 획득에 반발했다. 게다가 경쟁에서 탈락한 기업들까지 특혜설 제기에 가담하며 논란을 키웠다.

통신사업 진출을 위해 10년간 공을 들인 SK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했다. 그러나 선대회장은 "국민불신을 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오해 우려가 없는 차기 정권에서 실력으로 승부해 정당성을 인정받겠다"며 사업권을 반납했다. SK가 사업권을 반납하자 정부도 차기 정부에서 사업자를 재선정하겠다며 종전 결정을 백지화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통사업자 선정은 '2라운드'를 맞았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12월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를 선정하는 종전 방식과 한국이동통신(제1이동통신사업자)을 민영화하는 새로운 방식 등 두 가지 방안을 동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민간사업자는 전경련이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앞선 경우처럼 정부가 선정하면 기업간 경쟁과 잡음이 치열해지니 기업간 자율적으로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공교롭게 선대회장은 정부가 전경련에 결정을 요청했을 당시 이미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1993년 2월)된 상태였다.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할 때 SK를 민간사업자로 추천할 경우 공정성 시비가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번에는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1984년 3월 29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식회사 현판식. 사진=SK그룹 제공1984년 3월 29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식회사 현판식. 사진=SK그룹 제공

◆최종현, 자금 부담 반대에도 "통신사업 진출 기회 사야" = 대신 선대회장은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키로 했다. 선대회장은 이 방식이 한국통신의 자회사인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주식시장에서 공개매입하는 것이라 특혜시비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 봤다. 선대회장은 비용보다 특혜시비를 차단하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그러자 SK 예상대로 이 회사 주가가 8만원대에서 30만원 대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경영진이 막대한 인수자금 부담에 난색을 표하자 선대회장은 "우리는 지금 기업이 아니라 통신사업 진출 기회를 사는 것이다. 기회는 돈으로만 따질 수 없다"고 설득했다. 또 "이렇게 비싸게 사야 나중에 특혜시비가 일지 않는다. 회사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며 논란을 정리했다.

재계에선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라 유찰을 거쳐 가격을 낮출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선경은 1994년 1월 시세보다 훨씬 비싼 33만5000원에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인수했다. 인수가격은 총 4271억여원으로 서울 목동 7단지 전체(2550세대)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1992년 1차 선정 당시 체신부에서 사업자선정 전담반장을 지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 ICT포럼 회장은 "법적·행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선정이었고 SK가 다른 기업에 비해 모든 조건에서 월등했다"고 말했다. 석 회장은 정보통신부 정책심의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을 거쳐 KT 부회장을 역임한 한국 정보통신 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선대회장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통신기술 개발에 집중하며 통신강국의 기초를 닦았다. SK는 한국이동통신 경영권을 확보(1994년 7월)한 지 1년 반만에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하며 세계 통신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CDMA는 세계 표준으로 확산되면서 '대한민국=CDMA 종주국' 위상을 갖게 했다.

재계 관계자는 "SK는 노태우 정권에서는 억울한 오해로 사업권을 반납했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사업자 선정 과정에 불참하는 등 오히려 불이익을 당했다"면서 "그럼에도 도전정신과 패기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기술개발로 통신강국 기반을 닦은 드라마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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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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