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거듭하며 진화한 로드스터 아이콘운전자의 감성과 이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SLV8 퍼포먼스와 4기통 효율성의 극명한 차이
어떤 사람은 조용한 피아노 선율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공연장을 울리는 록 음악에 가슴이 뜁니다. 음악처럼 자동차에도 취향이 있죠. 조용하고 효율적인 차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름을 조금 더 먹더라도 우렁찬 엔진음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메르세데스-AMG SL은 그 두 가지 취향을 아주 재미있게 보여주는 자동차입니다. 같은 아름다운 차체 안에 V8의 진한 감성을 담을 수도, 4기통의 영리한 효율성을 담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SL의 뜻은 'Sport Leicht', 독일어로 '가볍고 스포츠성이 뛰어난 차'라는 뜻입니다. 1954년 걸윙 도어로 유명한 300 SL 등장 이후 메르세데스-벤츠의 SL은 단순한 로드스터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고성능, 지붕을 열고 달리는 낭만을 오랫동안 한데 담아온 자동차로 말이죠. 이번 시간에는 SL의 두 얼굴을 연달아 만나봤습니다. V8 4.0L 트윈터보 엔진을 품은 'SL 63 4매틱+'와 2.0L 4기통 터보 엔진을 얹은 'SL 43'입니다.
먼저 최고출력 585마력 SL 63에 올라탔습니다.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패들시프트를 당긴 상태에서 시동 버튼을 누르면 '이모션 스타트' 기능이 작동하면서 엔진이 높은 RPM으로 치솟고, 배기구에서는 웅장하고 사나운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른 아침이라면 이웃의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운전자의 심장을 깨우기에는 이만한 알람이 없습니다.
도로로 나서면 V8 특유의 음색이 본격적으로 살아납니다. 단순히 웅웅거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단단하고 거친 중저음이 귓가를 때리고, 가속 페달을 깊게 밟는 순간에는 차체가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온몸이 함께 밀려납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낮은 rpm에서 들리는 배기음인데, 마치 커다란 종이를 철제 드럼통 안에 넣고 사정없이 구기는 듯한 소리입니다. 거칠지만 묘하게 계속 듣고 싶습니다.
의외의 장점도 있습니다. 사나운 성능을 가진 자동차인데 소프트톱을 닫고 가변 배기 시스템을 끄면 실내가 상당히 조용합니다. 패브릭 지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방음과 정숙성이 뛰어나고,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상당히 편안합니다. 고성능 스포츠카이면서 럭셔리 GT의 역할까지 해내는 셈입니다. 지붕을 열었을 때는 벤츠 특유의 '에어스카프'가 제 역할을 합니다. 헤드레스트 아래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와 목덜미를 감싸주는데, 쌀쌀한 날에도 오픈에어링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꽤 쓸모 있는 기능입니다.
잠시 TMI를 풀자면, 이 차의 시트 변천사가 재미있습니다. 1세대 300 SL과 2세대 '파고다'는 완벽한 2인승 스포츠카였지만 3세대와 4세대 모델에서 2+2 형태가 등장했고, 이후 5세대와 6세대에서는 다시 2인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7세대 R232는 다시 자그마한 뒷좌석을 품었습니다. 성인을 태우고 훌쩍 떠나기엔 애매하지만 짐을 던져놓거나 급할 때 누군가를 태우기에는 요긴한 자리입니다. 정통 로드스터의 감성과 일상적인 활용성 사이에서 메르세데스가 고민한 흔적처럼 보입니다.
즐거움의 대가는 분명 존재합니다. 바로 연비인데요. 분명 시승을 시작할 때 기름을 가득 넣었는데, 연료 게이지가 떨어지는 속도가 엔진 수온계 오르는 속도와 비슷할 지경입니다. 가속 페달을 조금만 깊게 밟아도 계기판에 나타나는 평균 연비 숫자는 뚝뚝 떨어지죠. 고속도로에서 얌전히 달려야 겨우 리터당 10km 안팎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어 SL 43으로 갈아탔습니다. 단번에 느껴지는 차이가 꽤 큽니다. 585마력 V8을 먼저 경험한 뒤 2.0리터 4기통 터보에 앉으니 가속할 때 밀어붙이는 힘부터 엔진음의 깊이까지 확실히 다른 차라고 느껴지죠. 그렇다고 SL 43이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추구하는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해야 할 텐데요. SL 63이 묵직한 근육으로 도로를 밀어붙이는 차라면, SL 43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코너를 요리조리 파고드는 차에 가깝습니다.
외관은 거의 같습니다. SL 특유의 낮고 날렵한 실루엣은 그대로이고, 뒤쪽 네 발 배기구가 63의 각진 형태와 달리 둥글게 다듬어졌다는 정도가 눈에 띕니다. 실내 역시 엔트리 모델이라고 해서 값싼 느낌이 드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디지털 계기판의 최고속도 눈금이 63은 360km/h, 43은 300km/h까지 표시된다는 소소한 차이 정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도로에 나서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가벼움'입니다. 거대한 V8 대신 비교적 가벼운 4기통 엔진을 얹은 만큼 차체 앞부분의 무게 부담이 줄었고, 이에 따라 코너를 돌아나갈 때 차체가 한결 사뿐하고 경쾌하게 움직입니다. SL 63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이라면 SL 43은 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느낌입니다. 네 바퀴를 굴리는 63과 달리 오직 뒷바퀴만 굴린다는 차이도 무시할 수 없겠죠. 같은 SL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운전자가 느끼는 맛은 꽤 다릅니다.
무엇보다 4기통이라고 결코 얌전한 엔진은 아닙니다. 최고출력은 웬만한 6기통 터보 엔진을 넘어서는 421마력에 달합니다. 배기음 또한 V8처럼 깊고 두꺼운 울림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사납고 당차죠. 2.0L 엔진에서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꽤 재미있습니다.
연비는 더욱 놀랍습니다. 자유로에서 정속 주행을 이어가자 계기판에 리터당 15.7km가 찍혔습니다. SL이라는 이름과 화려한 디자인을 생각하면 상당히 인상적인 숫자입니다. SL 63을 탈 때 연료 게이지를 애써 외면했던 제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승차감 역시 다릅니다. 차체가 가벼워지고 엔진 성능에 맞춰 서스펜션 세팅도 달라진 탓인지 노면의 움직임을 조금 더 직관적이고 통통 튀는 감각으로 전달합니다. 편안하면서도 운전자에게 도로의 상태를 조금 더 솔직하게 알려줍니다. 기능적 차이로는 차고를 높여주는 프론트 리프트와 '레이스(RACE)' 주행 모드가 빠졌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편의장비와 주행 보조 시스템은 63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대의 SL을 연달아 타고 나니 각각의 성격이 꽤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SL 43은 이성적인 선택입니다. SL 63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름다운 디자인과 화려한 실내를 누리면서도 가벼운 움직임과 뛰어난 연비를 챙길 수 있습니다. 반면 SL 63은 철저하게 감성의 영역에 있습니다. 585마력 V8 엔진이 만들어내는 가속력과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터져 나오는 배기음은 숫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선택은 운전자의 취향에 달렸습니다. 매일 타야 하는 자동차라면 SL 43의 손을 들어주고 싶고,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보다 조금 더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SL 63에 마음이 갑니다. 게다가 두 모델의 가격 차이는 무려 9000만원에 달합니다. 고급 수입차 한 대 값에 가까운 돈을 더 내고 V8과 585마력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4기통 SL의 경쾌함과 효율성을 누릴 것인지, 생각보다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영화를 고를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평소에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을 찾다가도 가끔은 굳이 극장에 가서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로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SL 43이 일상에서 편하게 꺼내 보는 좋은 영화라면, SL 63은 9000만원을 더 내더라도 아이맥스관 한가운데 앉아 제대로 즐기고 싶은 작품에 가깝습니다.
관련기사
관련태그
뉴스웨이 권지용 기자
senna@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