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케미칼은 먼저 칼을 뽑았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석유화학 설비를 정리하고 생산능력을 줄이는 사업재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묘한 셈법이 생겨났다. 먼저 생산능력을 줄인 기업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이 나오는 것은 이번 구조조정이 특정 기업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업계 전체의 공급과잉을 줄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대산 1호 프로젝트 통합법인이 출범했고 여수에서도 사업재편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능력 270만~370만톤 감축 목표가 실제 설비 감축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대산과 여수에서 거론되는 감산 규모는 약 250만톤이다. 정부 목표의 최소치에 가까운 규모다. 숫자만 보면 구조조정은 상당히 진척됐다. 하지만 감산 규모가 구체화할수록 기업들의 셈법은 오히려 복잡해진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943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범용 석화 사업의 수익성이 악화한 만큼 생산능력을 줄이고 사업구조를 바꾸는 것이 생존을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설비를 선제적으로 정리하면서 구조조정의 선두에 선 셈이다.
다른 기업의 계산은 다르다.
기존 석화 사업에서 비교적 수익을 내고 있거나 원료 조달부터 생산, 다운스트림까지 수직계열화한 기업이라면 지금 가동 중인 설비를 스스로 줄이기가 쉽지 않다. 생산능력을 줄이는 순간 매출과 시장 점유율을 포기해야 하고, 설비 감축에 따른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감산의 효과가 감산한 기업에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기업이 생산능력을 줄이면 공급과잉이 완화되고 제품 가격과 수급 여건이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경쟁사가 설비를 유지하더라도 그 시장 개선의 효과를 함께 누릴 수 있다.
한쪽은 생산능력과 매출을 내놓는데 다른 쪽은 설비를 유지한 채 업황 개선의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구조다.
기업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줄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먼저 감산하면 경쟁사에 시장을 내줄 수 있지만 이후 업황이 개선되면 그 효과는 업계 전체가 공유한다. 반대로 다른 기업들이 먼저 줄인다면 생산능력을 유지하면서 시장 개선을 누릴 수 있다.
구조조정에서 말하는 '무임승차'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유와 석화를 함께 하는 기업은 셈법이 더 복잡하다. GS칼텍스처럼 정유와 석화가 수직계열화된 기업은 NCC 설비만 떼어내 감산하기 어렵다. 원료 조달부터 정유, 석화, 다운스트림까지 사업이 연결돼 있어 특정 설비 하나의 경제성만으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감산이라도 기업마다 손익계산서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적자를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다른 기업에는 아직 수익을 내는 설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정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구조조정의 성패를 감산 물량 하나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대산과 여수에서 250만톤이 줄었다는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물량을 누가 줄였고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며 이후 개선되는 시장의 과실을 누가 누리느냐다.
정부가 감산 목표를 제시하고 기업의 사업재편을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 먼저 움직이는 기업이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는 구조라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능력을 줄일 유인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구조조정에서 어려운 것은 설비를 줄이는 일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먼저 줄인 기업의 희생이 경쟁사의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먼저 움직인 기업은 생산능력과 비용을 내놓고 뒤늦게 따라온 기업은 개선된 시장을 함께 누린다면 '자발적 구조조정'은 지속되기 어렵다. 석화업계 구조조정의 진짜 시험대는 감산 목표를 채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먼저 움직인 기업이 손해 보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뉴스웨이 김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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