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L V12 엔진이 뿜는 힘, 소리마저 삼킨 정숙성별빛 수놓은 천장과 장인의 손길이 빚은 실내팬텀의 위엄과 차별화한 역동성, 운전자 중심의 럭셔리
자동차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거대한 엔진을 깨워 우렁찬 배기음을 토해내거나, 날카로운 디자인으로 주변의 시선을 붙잡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주변 차들을 압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 편이 훨씬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보고,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누구나 길을 비켜주는 자동차. 100년 넘게 자동차가 도달할 수 있는 호화로움의 경계를 넓혀온 롤스로이스가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롤스로이스의 라인업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신화 속 서재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팬텀(유령), 쉐도우(그림자), 스피릿(영혼), 세라프(천사), 클라우드(구름), 던(동틀 녘), 스펙터(유령). 그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손에 잡히지 않거나 형체가 없으며, 혹은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자신의 DNA에 부여해 왔습니다. 소음이라는 지상의 번잡함을 초월해 버린 자동차에 이보다 더 사치스럽고 우아한 호칭이 또 있을까요. 오늘 만나볼 주인공 역시 가문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다재다능한 유령, 고스트입니다.
이름부터 유령을 뜻하지만, 정작 도로 위에서 마주한 고스트는 결코 희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길게 뻗은 보닛과 묵직한 차체, 그 끝에 꼿꼿하게 선 환희의 여신상까지. 어느 요소 하나 요란하게 소리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뒷좌석에 몸을 맡기는 순간까지, 세상의 번잡함을 한 겹 걷어내고 자신만의 속도로 움직이는 자동차이지요.
운전석에 앉아 길게 뻗은 보닛 끝자락을 바라보면 우뚝 선 환희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웅장하게 날개를 펼친 작은 여신은 마치 거대한 성문 위에 세워진 수호신처럼 도로 위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자동차도, 무례하게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도 이 앞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거대한 금속 요새 안에 몸을 맡기고 있자면 세상의 그 어떤 풍파도 감히 나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신뢰감이 싹틉니다.
롤스로이스의 고급감은 도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번 시승차의 외장 색상 이름은 머스틱 블루인데요. 고급 세단이라고 하면 으레 짙은 검은색 차체부터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고스트는 이런 화사한 푸른빛도 제법 근사하게 소화합니다. 색을 입히는 데서 끝나지 않고, 여러 겹의 도장과 래커를 쌓고 장인이 직접 표면을 연마해 깊은 광택을 완성합니다. 웅장한 차체와 고전적인 디자인에 산뜻한 색감이 더해지니, 자칫 중후함에만 머물 수 있는 럭셔리 세단이 한층 젊고 감각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문턱을 넘어 실내로 들어서면 한 번 더 반전이 기다립니다. 최고급 가죽으로만 뒤덮여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죽과 조화를 이룬 감각적인 직물 시트가 손끝을 맞이합니다. 가죽과는 또 다른 은은하고 따스한 감촉입니다. 여기에 실내 곳곳을 더듬는 화려한 옥색 포인트 컬러가 눈길을 끕니다. 자칫 고풍스럽다 못해 고리타분해질 수 있는 실내 분위기에 옥색 한 방울을 떨어뜨리니, 장인의 손길로 완성된 클래식함 위에 순식간에 현대적인 미학이 얹어집니다.
의외로 물리 버튼이 상당수 남아 있습니다. 화면을 터치하는 방식이 익숙해진 요즘 자동차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를 시대에 뒤처진 구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필요한 기능을 직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고, 손끝에 닿는 버튼 하나까지 고급스러운 소재와 정교한 마감으로 완성했으니까요. 최신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익숙한 방식을 버리기보다, 오랫동안 검증된 편리함을 자신들만의 품격으로 다듬은 셈입니다. 유행을 좇지 않으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쉽게 낡은 느낌을 주지 않기. 타임리스라는 단어가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는 거대한 유령의 심장이죠. 고스트의 보닛 아래에는 6.75리터 V12 트윈터보 가솔린 엔진이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배기량 줄이기와 전동화가 미덕인 시대에 6.75와 12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로망이자 고집입니다. 무릎을 꿇고 현실과 타협하느니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걷겠다는 옛 거장의 기개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운전석 왼편의 시동 버튼을 누르자 V12 엔진이 눈을 뜹니다. 하지만 계기판을 보지 않는다면 시동이 걸렸는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거슬릴 만큼 완벽한 고요를 선사하죠. V12 엔진의 거친 회전 질감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철없는 욕심은, 고스트의 완벽한 방음 기술 앞에 무력하게 산산조각이 납니다. 어설픈 전기차의 정숙성은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 정도입니다.
보통 2.6t이 넘는 거구 대형 세단을 출발시킬 때 운전자는 무게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고스트는 초반 세팅에 담력을 싹 몰아넣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가속 페달을 살짝만 가볍게 건드려도 차체가 멈칫거림 없이 쭉쭉 앞으로 나아갈 뿐이죠. 엔진의 힘을 가볍게 툭 풀어놓는 세팅 덕분에 운전하는 내내 거대한 차가 무겁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계기판에 표시하는 파워 리저브 게이지는 남은 힘의 여유를 퍼센트(%)로 보여주는데, 페달을 꾹 눌러 가속을 이어나가도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모릅니다. 언제든 원할 때 지상의 모든 차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사막을 건너갈 수 있는 완벽한 힘의 비축입니다.
승차감에 대해서는 마법의 양탄자라는 수식어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습니다. 도로 위 크고 작은 요철과 불쾌한 진동은 에어 서스펜션을 거치며 1차로 분쇄되고, 푹신하고 두툼한 시트가 다시 한번 걸러냅니다. 노면의 잔진동이 시트를 통과하면서 무해한 촉감으로 바뀌어 엉덩이에 전달되는 기분이 정말 고급스럽습니다. 도로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부드러움을 유지하면서도, 무게중심은 저 바닥 깊은 곳에 묵직하게 깔려 고속도로를 비행하듯 달려나가죠.
롤스로이스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 코치도어를 열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문을 열고 탑승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귀빈 대접처럼 느껴지며, 닫을 때는 그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스르륵 문이 스스로 찾아와 닫힙니다. 손가락이 쑥 들어갈 정도로 깊고 푹신한 양털 플로어 매트와 은은한 가죽 향, 두툼한 시트가 몸을 감싸 안으면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합니다. 왜 롤스로이스가 이 공간을 두고 '치열한 비즈니스 한가운데 자리한 오아시스'라고 불렀는지 단번에 납득이 갑니다.
머리 위를 바라보면 고스트의 하이라이트인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펼쳐집니다. 1300여개 광섬유를 장인이 직접 손으로 완성한 밤하늘은, 때때로 소원을 빌고 싶어지는 별똥별을 실시간으로 떨어뜨려 줍니다. 안타깝게도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운전자는 이 장관을 마음껏 누리기 어렵습니다. 오직 2열에 앉은 VIP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호사입니다. 재밌는 점은 뒷좌석 구성입니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처럼 다리를 완전히 뻗고 누울 수 있는 퍼스트 클래스 형태의 광활한 공간은 아니고, 리클라이닝 각도도 일정 수준으로 제한됩니다.
이는 고스트가 가진 명확한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최고 존엄의 플래그십 자리는 '팬텀'에게 맡겨두고, 고스트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평일에는 직접 운전대를 잡고 출퇴근을 즐기다가, 주말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에 태우고 따뜻한 여정을 떠나는 패밀리카로서의 역할까지 완벽히 수행해 냅니다. 앞좌석에서는 운전의 가벼운 쾌감을, 뒷좌석에서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일상이 모두 가능한 차인 셈입니다.
5억원을 훌쩍 넘어서는 가격표. 세상에는 더 첨단 기술로 도배된 차도, 실내 공간이 넓은 차도 많지만, 롤스로이스라는 유령이 주는 압도적인 헤리티지와 위엄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는 감히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로 위 모든 유해함을 유유히 가르며 나아가는 환희의 여신상 뒤에서 우리는 자동차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럽고 우아한 유령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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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권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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