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는 봄, 훈풍을 타고 온 악녀(惡女)들이 안방극장을 점령하고 있다.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복수에 혈안이거나 눈을 뒤집고 맹목적으로 파고드는 악녀가 아니다. 교양 있고, 기품 있는 우아한 악녀이기에 더 현실적이고 무서운 이들인 것이다.
‘왔다 장보리’ 연민정(이유리 분)이나 ‘아내의 유혹’ 신애리(김서형 분)는 화가 나면 분노하고 분을 이기지 못해 오열하기도 한다. 함정에 빠지면 가해자를 즉시 찾아가 ‘내게 왜 그랬냐’며 침 튀기며 따져 묻는다. 이처럼 기존 안방극장 악녀들은 본인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시청자 역시 일명 ‘욕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 것도 사실이다. 권선징악 결말이 전개될 때엔 악녀가 악함의 댓가를 치르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비록 권선징악이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더라도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낀 것.
이러한 구조가 인기를 얻자 반복됐고, 이에 염증을 느낀 시청자는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 잔잔한 일상 속 재미와 현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드라마가 대세를 이루자 드라마 속 악녀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악녀는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지 않는다. 우아하고 기품 있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조용히 처리한다. 이게 요즘 악녀의 트렌드(TREND)라 볼 수 있다. 그 예로 현재 안방에서 악녀로 활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新 악녀 3인방이 여기에 있다. 바로 ‘여왕의 꽃’ 김성령, ‘착하지 않은 여자들’ 서이숙, ‘빛나거나 미치거나’ 이하늬가 그 주인공이다.
◆ 용이주도하고 치밀하게, ‘여왕의 꽃’ 김성령
MBC ‘띠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에서 허당 면모를 드러내며 예능 대세로 떠오른 배우 김성령이 안방극장에 돌아왔다. 김성령은 MBC 주말드라마 ‘여왕의 꽃’(극본 박현주, 연출 이대영 김민식)에서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에 악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레나 정 역으로 분하고 있다. 레나 정은 어린 시절, 노름꾼 아버지의 폭력을 못이긴 어머니의 가출과 화재로 인해 가족들이 사망한 후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인물이다. 이후 미혼모가 되어 딸을 버리고 유학을 떠난 비정한 엄마이기도 하다. 불우한 유년시절과 비뚤어진 모정을 연기하는 김성령은 악녀 아닌 악녀로 분하고 있다.
특히 가면을 쓴 채 자신의 아욕을 위해 제벌2세 박민준(이종혁 분)에게 접근하는 등 치밀한 악녀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 여기에 또 다른 야욕가이자 박민준의 계모인 마희라(김미숙 분)가 레나정의 정체를 눈치 채며 본격적인 대립에 나섰다. 흥미로운 점은 우아함의 대명사인 김성령과 김미숙, 두 배우가 발톱을 숨기고 가면을 쓴 악녀로 대립한다는 점이다.
또 여기에 친딸 이솔(이성경 분)을 버리게 된 사연과 친모의 정체를 알게 된 이솔과 레나 정이 대립할 것으로 보여 레나 정은 더욱 풍부한 캐릭터를 표현할 것으로 예상된다.
◆ 욕망을 숨긴 채 자신 마저 속였다···‘착않녀’ 서이숙
배우 서이숙은 KBS2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극본 김인영, 극본 유현기 한상우)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제자 김현숙(채시라 분)을 학대하는 선생 나현애 역으로 분하고 있다.
김성령이 가면을 쓰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형태의 악녀라면 서이숙은 소름끼쳐서 몸서리치게 만드는 악녀다. 나현애는 가난한 집 다섯 째 딸로 자라 수업비를 못내 꾸지람을 당하는 등 불우한 과거를 지닌 인물. 이에 이를 악물고 공부해 대학에 들어가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트라우마와 아픔을 제자 김현숙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던 것.
나현애는 교사 시절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제자를 목도리 도둑으로 몰아 학교에서 퇴학시키고도 뻔뻔하고 고고한 교사 코스프레를 한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이두진(김지석 분) 앞에서도 청렴한 교사인 척을 하며 자신마저 속이고 있다.
극중 서이숙은 복수를 위해 찾아온 김현숙을 냉대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조롱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는 면모를 보이며 차갑고 뻔뻔한 악역을 소화하고 있다. 서이숙 역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악역이다. 전작에서 보였던 수다스럽고 억척스러운 중년 여성이 아닌 교양 있고 여성스럽고 차분하게 자신의 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옆집에 혹은 학교나 직장 등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이기에 더 무섭다.
◆ 야망과 사랑의 딜레마···‘빛나거나 미치거나’ 이하늬
배우 이하늬는 MBC 월화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극본 권인찬 김선미, 연출 손형석 윤지훈)에서 고려 왕건의 딸이자 가문의 보이지 않는 책사 황보여원 역으로 분하고 있다.
방송 전부터 ‘선덕여왕’ 미실 역으로 분한 고현정으로 연상시키며 화제를 모은 이하늬는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 가시를 지닌 꽃처럼 예쁘지만 내면에 독을 품고 사는 공주를 연기하고 있다.
황보여원은 냉정한 여인으로 공주가 아닌 사내로 태어났으면 황제를 꿈꾸었을 만큼 야망이 있는 여인이다. 무엇보다 가문이 우선인 여원은 저주받은 이복동생 왕소(장혁 분)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의 가문이 고려 제일의 가문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아우인 왕욱(임주환 분)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극에서 물불 안가리는 악역 왕식렴(이덕화 분)과 악역 쌍벽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가문을 지키려는 야망과 남편 왕소와 신율(오연서 분)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왕소에 연정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여원이 가문과 왕소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앞서 여원은 신율과 왕소를 떼어놓기 위해 자신의 신복을 통해 악행을 일삼았지만, 이후 왕소를 향한 진심을 내비치며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딱하다’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김성령, 서이숙, 이하늬의 공통점은 생활밀착형 악녀라는 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 공식을 따르고 있지 않으며, 현실 속 인간상이 반영되어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 또 이들은 ‘센 여성이 악녀다’라는 성(性)차별적인 공식을 깨고 예쁘고 우아해도 나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며 배역을 풍부하게 완성시켰다.
안방극장 속 악녀 캐릭터들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주인공과 대립하기에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하지만 현실적이어서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진화하고 있는 것.
이쯤되면 ‘악녀’란 악(惡)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리얼한 현실을 배역에 투영했기에 무섭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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