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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IMF국가 부도 사태 그림자

김영삼 전 대통령, IMF국가 부도 사태 그림자

등록 2015.11.22 10:30

김성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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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시행 성과도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도 새삼 회자되고 있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 역대 정부에서 쉽사리 할 수 없는 경제개혁 정책을 전격적으로 실시했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 시장개방을 시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기 말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연이은 도산 등 곳곳에서 켜진 ‘경제 적신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해 급속한 자본시장 개혁으로 자본유출입이 허용되면서 외환위기를 맞게 됐고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겪어야만 했다.

고인이 된 김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당시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경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업고 금융·부동산 실명제를 도입하며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 확보에 정책의 주안점을 뒀다.

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은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법 도입으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를 막으려고 1995년 1월 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고 입법 절차는 3주 만에 신속하게 이뤄졌다.

김영삼 정부는 전반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업적으로꼽힌다.

정부 차원에서 OECD 가입을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가입 협상을 벌여 성사시킨 일이었고 급격한 자본유출 등이 우려돼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나왔다.

OECD 가입은 불과 1년 만에 우려됐던 사안들이 현실로 다가서게 된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계기로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피치를 올렸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위기를 맞게 된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벗어나게 된다.

김영삼 정부 5년간 경제부총리를 6번이나 바꿔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이 수립·집행되지 못했고,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은 점은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김성배 기자 k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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