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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철수’ 된 안철수, 문과 맞대결 필승 자신

[대선 인물파일]‘독철수’ 된 안철수, 문과 맞대결 필승 자신

등록 2017.04.06 09:48

수정 2017.04.06 18:07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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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스스로 접은 꿈, 이제 제대로 편다文과 ‘일 대 일’ 구도, 합리적 이미지 구축국정경험 없고 지지기반 부족 한계 극복해야

편집자주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 따라 오는 5월9일 실시되는 조기 대선을 앞두고 원내 5당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대선후보를 선출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문재인 후보, 자유한국당에서 홍준표 후보, 국민의당에서 안철수 후보, 바른정당에서 유승민 후보, 정의당에서 심상정 후보가 각각 본선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선은 이렇게 5자 구도로 출발하게 됐다. 각 후보들이 걸어온 길과 대선에 맞춰 내놓은 공약, 강점과 약점을 조명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사진=최신혜 기자 shchoi@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사진=최신혜 기자 shchoi@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18대 대선의 목전에서 꿈을 접었다. 지난 4년 동안의 와신상담을 통해 권토중래를 꿈꾸며 돌아온 그는 호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을 일구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다시금 대선의 출발선에 섰다. 그것도 자신이 양보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벌이는 사실상의 맞대결이다.

◇안철수는 누구인가
안 후보는 1962년 부산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냈다. 부산고를 졸업한 안 후보는 공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의사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고, 여기서 현재 아내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를 만났다.

의사 박사과정 중에 컴퓨터 바이러스에 관심을 갖게 된 안 후보는 치열한 연구 끝에 1988년 한국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이렇게 자신이 만든 백신 프로그램 ‘V3’를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시에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아 1990년 만 27세의 나이로 단국대 의대 최연소 학과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1995년에는 ‘안철수 연구소’를 설립하고 의사가 아닌 벤처사업가로 진로를 완전히 변경했다. 4년의 적자 끝에 크게 성공한 안 후보는 회사 설립 10년 만인 2005년 안철수 연구소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미국 펜실베니아로 유학을 떠났다.

와튼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고 돌아온 그는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2011년부터 전국 각지를 돌며 ‘청춘콘서트’를 갖고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N포 세대’로 불리는 힘겨운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청춘 멘토’라는 별명도 얻었다.

정치적으로 ‘안철수’ 브랜드가 처음으로 강력하게 각인된 시기는 2011년 10·26보궐선거였다. 50%가 넘는 지지율을 받으며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유력시되던 안 후보는 그러나 당시 인지도가 미미한 박원순 당시 민주당 후보를 전격 지지선언하며 출마를 포기한다. 이는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양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안 후보는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여론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울시장 후보직 양보에 이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안랩(구 안철수 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하면서 대중적 인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이를 바탕으로 안 후보는 2012년 9월, 18대 대선을 3개월 가량 남겨둔 시점에서 대권 도전에 나섰다. 서울 종로에 ‘진심캠프’로 명명한 대선캠프를 꾸리고 명망가들과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했다.

안 후보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함께 삼각 구도를 형성했으나 야권후보 단일화 여론에 밀려 문 후보와 협상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기성 정당이 공고하게 갖춘 조직력을 경험한 안 후보는 큰 상처를 입고 결국 대선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후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문 후보를 돕다 선거 당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듬해 3월 귀국한 안 후보는 서울 노원병 재보선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하며 정치권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1년 뒤 새정치연합을 창당한 안 후보는 당시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제안에 따라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통합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같은 해 7·30재보선에서 참패를 거두면서 입지가 흔들렸고, 결국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 이후로 당내 친노계와 갈등을 보인 끝에 20대 총선을 100여일 앞둔 2015년 12월 탈당에 이어 지난해 2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독자세력 구축 이후 처음으로 맞은 지난해 4·13총선에서 호남 지역구를 휩쓸고 비례대표 투표에서 상당한 득표를 거두면서 38석의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차기 대권주자 선호도에서 선두권으로 급부상한 것도 이 시점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총선 직후 불거진 리베이트 의혹으로 정치적 입지에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자신이 영입한 박선숙·김수민 의원이 해당 의혹에 연루돼 기소되면서 안 후보는 결국 대표직을 사퇴했다. 여론조사에서의 지지율도 10% 미만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같은 분위기를 뒤집고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탄핵의 ‘공’은 더불어민주당에게 사실상 빼앗겼으나 지난 1월 박 의원과 김 의원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리베이트 의혹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기획수사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활로를 찾았다.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다른 정치세력과의 연대나 ‘제3지대론’ 같은 주장이 당내에서 제기됐지만 그때마다 ‘자강론’으로 맞서 돌파했다. 이번 대선 경선을 앞둔 시점에서도 호남계를 중심으로 외부와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호남 민심의 높은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문 후보와의 일 대 일 구도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더민주 경선이 마무리된 이후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 등의 지지율을 오히려 안 후보가 흡수해 양자 대결에서는 문 후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안철수의 사람들
대선을 준비하는 안 후보 캠프의 중심축은 과거 18대 대선을 앞두고 활동했던 진심캠프 인사들과 국민의당 현역 의원 등 크게 두 줄기로 이뤄져 있다.

진심캠프 출신으로는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김성식·박선숙 의원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출신의 김 의원은 국민의당에서도 정책위의장 등을 거치며 손꼽히는 정책통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박 의원의 경우 지난 대선 이후 안 후보와 잠시 거리가 멀어지기도 했으나 국민의당 창당과 함께 본격적으로 다시 합류했다.

조광희 비서실장을 비롯해 박왕규 상황실장, 박인복 국민소통실장 등도 진심캠프 시절부터 안 후보와 함께 동고동락해온 인물들이다.

국민의당 현역 의원들도 이번 대선에서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송기석·최경환·윤영일·이용주·이용호·채이배·김중로 의원 등 초선 의원들은 캠프에서 각기 분야의 본부장을 맡아 활약 중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와 박주선 국회부의장 등 경험이 많은 원로급들은 후방 지원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 그룹은 과거부터 탄탄했다. 현재 대세론을 밀어붙이고 있는 문 후보 쪽으로 인적 자원이 쏠린 상황이지만 안 후보 역시 만만치 않은 자문그룹을 확보했다. 현재 ‘정책네트워크 내일’과 ‘안철수와 함께하는 전문가광장’에는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와 박원암 홍익대 교수,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표학길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현 동아대 교수, 천근아 연세대 교수 등 이름 있는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필살기&아킬레스건
정계입문 당시 안 후보의 최대 강점은 ‘신선함’이었다. 기성 정치권과는 다른, 타성이 찌든 정치권을 바꿔줄 것이란 기대가 ‘안철수 열풍’을 만들었다.

4년이 지난 현재 그 선도는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평가다. 좌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그의 행보는 합리적이라는 이미지로 귀결됐다. 이는 갈 곳을 잃은 보수층과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중도층을 모두 공략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반면 안 후보는 국정 운영의 경험이 전무한 데다 당직을 맡은 시기도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당대표 시절의 정치적 성과도 사실상 내세울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독자세력화에 성공한 것은 안 후보의 큰 경험이지만 여전히 문 후보에 비해 그 세력의 크기가 다소 모자란다. 지역기반도 무른 편이다.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에게는 좀처럼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청년 멘토’ 시절 그에게 매료됐던 청년층의 다수는 이제 안 후보에 대해 비판적이다. 또한 자신이 몸담은 국민의당의 의석이 40석 가량에 머무는 데다 대부분 호남에 편중돼 있어 집권 이후 국정 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뉴스웨이 이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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