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시장이 원하는 것은 8단 HBM" '12단 제품'으로 앞세운 삼성전자 견제 포석 LG전자도 'AI가전 원조' 놓고 장외설전 지속
26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올 들어 반도체·가전 등 핵심 사업 부문에 화력을 집중하자 SK와 LG가 불편함 속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새다.
먼저 SK하이닉스는 지난 25일 실적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차세대 HBM 관련 질의에 "올해 거래처가 원하는 HBM3E 제품은 주로 8단"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HBM3E 12단 제품은 요청 일정에 맞춰 3분기 중 개발을 완료할 것"이라며 "거래처 인증을 거친 뒤 수요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내년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발언은 HBM 시장을 양분한 삼성전자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가 한 발 앞서 12단 제품을 만들었다고 하나, 아직 응용처가 없을 뿐 아니라, SK하이닉스도 그 정도 역량은 갖췄다는 의미라는 게 전반적인 해석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36GB(기가바이트) HBM3E 12H(12단 적층)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리며 기술력을 과시한 바 있다. TSV(실리콘 관통 전극) 기술과 열압착 비전도성 접착 필름(Advanced TC NCF) 기술로 24Gb(기가비트) D램 칩을 12단까지 쌓아 성능을 크게 끌어올린 제품이다. 그러면서도 높이는 기존 8단 제품과 동일하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삼성전자의 광폭 행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HBM만큼은 줄곧 삼성에 앞서 있었는데, 경쟁자의 약진으로 1위 자리가 흔들릴 수 있어서다.
비슷한 시간 최태원 SK 회장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나 AI 분야에서의 협업 방안을 논의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란 시선도 존재한다. 삼성전자 제품에 대한 엔비디아의 테스트가 막바지에 접어든 것으로 감지되는 가운데, 젠슨 황 CEO도 삼성 측에 호감을 드러내자 그룹 총수가 직접 움직인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AI 가속기'를 장악한 엔비디아에 4세대 HBM(HBM3)을 독점 공급하다시피 했고 지난달 말부터 신제품 HBM3E 납품도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점유율을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1위를 수성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새 제품이 엔비디아의 눈높이를 맞췄다는 판정을 받는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SK하이닉스로서는 가격 협상력을 잃거나 물량을 일부 나눠가져야 한다.
LG전자도 삼성전자와 가전 사업을 둘러싼 자존심 싸움을 벌인 바 있다. 'AI 가전' 신제품 마케팅 경쟁이 이른바 '원조가 누구냐'는 장외설전으로 비화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여기엔 'AI는 삼성'이라는 슬로건이 불씨가 됐다. 업계에서 AI 기술 확산을 이끌고 있다는 삼성전자의 자평에 LG전자가 'AI 가전 시대를 연 쪽은 우리'라면서 맞불을 놓은 게 그 시작이다.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들의 논쟁은 CEO까지 참전하면서 한층 가열됐다. 조주완 LG전자 CEO가 "AI 가전의 시초는 사실 LG전자의 업(UP)가전"이라고 언급한 것에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누구나 다 하지만, 실생활에 적용된 제품은 삼성이 가장 많다"고 응수하면서다.
이처럼 SK와 LG가 삼성을 의식하는 데는 자칫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란 불안감에서 비롯됐다고 재계는 진단한다. 삼성이 반도체와 스마트폰, 신(新)가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업 영역에서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뛰어들어 끝내 '퍼스트 무버'로 올라서는 전략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HBM만 봐도 그렇다. 삼성은 경쟁사보다 늦게 사업에 착수했지만 지금은 미국 마이크론을 큰 격차로 따돌린 것은 물론 '12단 제품'을 앞세워 선두 SK하이닉스를 위협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1·2위 자리를 놓고 국내 기업 간 경쟁이 펼쳐지는 것은 아쉬운 장면"이라면서도 "그 과정을 거치며 회사와 제품이 더욱 주목을 받고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도 있는 만큼 이들의 신경전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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