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개혁 외치지만 신설·강화된 규제 612건, 개선·철회 65건뿐IT·제약·바이오 기업, 국내 규제 피해 해외로··· 일자리·기술 유출 우려규제샌드박스 유명무실···전문가 "실질적 규제 철폐 없이 혁신 어려워"
네거티브 규제(법에서 금지하는 사항만 제한) 도입이 추진된 지 수년이 흘렀지만, 기업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미미하고 오히려 규제의 벽이 더욱 높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진정한 경제 혁신을 위해서는 '규제 개혁'이 아닌 '규제 철폐' 수준의 강력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부는 신기술과 신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을 추진한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달랐다. 기업들은 여전히 복잡한 사전 승인 절차에 묶여 있으며, 규제 샌드박스(일정 기간 규제 면제 제도) 역시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업 65.3%가 "정부의 규제 개혁이 실제로 기업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또한 한국무역협회(KITA)의 조사 결과, 국내 스타트업의 44.1%가 "국내 규제로 인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25.4%는 이러한 이유로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각 부처 간 조율 부족과 규제 해석의 모호성이다. 대통령 소속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중앙행정기관이 신설하거나 강화하려던 규제는 총 612건에 달했으며 이 중 65건만이 개선 또는 철회 권고를 받았다.
일부 규제가 완화된 점은 긍정적이지만, 전체 규제 증가 폭이 여전히 크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특히, 전년(2022년) 대비 규제 증가율이 20%를 넘어섰다는 점은 정부가 실질적으로 규제 신설과 강화를 더 활발히 추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승민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술이 아닌 규제로 전 세계를 리드하려고 한다"며 "무리한 규제가 기업 혁신과 성장의 걸림돌이 되면서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생태계를 지배한 플랫폼이 시장 경제를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빅테크 규제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플랫폼을 공적 도구로 취급해 정부가 가격을 지정하고 행정 제재, 형사처벌 등 과도한 규제를 자행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현재 국내 플랫폼 기업은 과도한 규제 환경에 처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비교해 현저히 열세한 위치에 있다. 예컨대 네이버의 경우 시총 30조원 수준이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5000조원 이상"이라며 "이렇듯 열세인 상황에서 규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만일 국내 플랫폼이 규제로 인해 사라진다면 글로벌 플랫폼의 독과점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IT와 제약·바이오 업계는 정부 규제로 인해 신기술 상용화가 어려운 현실을 토로하고 있다. 국내 한 IT 기업 관계자는 "AI 기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지만, 정부 부처의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사업 방향대로 밀고 나가기 어렵다"며 "해외에서는 신기술을 먼저 허용하고 사후 규제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성장하는데, 한국은 여전히 사전 승인 절차가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네이버클라우드는 의료 AI 솔루션을 개발했지만, 국내 의료법 규제로 인해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회사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려 ▲AI 기반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차세대 고객 관리(CRM) 시스템 ▲다국어 모듈 지원 시스템 등을 포함한 해외 수출형 AI 의료 시스템을 현지에 도입할 계획이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센터장은 "AI 강대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생태계 전략 재정비가 필요하다. 트럼프 정부의 규제 완화 전략에 맞춰 네거티브 규제와 샌드박스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며 "규제 자체가 본질이 아닌 혁신을 위한 규제가 선행돼야 한다. 실제 많은 나라들이 채택 중인 네거티브, 샌드박스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용희 경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역시 "플랫폼 패권 경쟁 과열으로 규제 수준이 각국 기업의 기회와 위상을 결정한다. 규제가 엄격할수록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 속도와 경쟁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 미국은 AI 발전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IT 기업들이 규제를 피해 해외로 진출하면서, 국내 일자리 감소와 세수 손실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는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국내 IT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해외 진출 과정에서 핵심 기술이 외국에 유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국내 기술 보호 체계의 취약성과 맞물려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5년간(2020~2024년 8월) 해외 기술 유출 시도는 97건에 달하며, 유출 시 피해액은 23조 원대로 추산된다.
정주연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전문위원은 "정부의 천편일률적인 규제 기준 적용으로 생태계 혁신이 저하될 위기에 처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산업 속도를 정작 입법자, 정책 입안자들이 따라가지 못해 생긴 부작용"이라며 "지난해 티메프 사태로 규제가 더욱 강화됐는데 이는 전반적인 플랫폼 생태계 혁신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도 국내 규제 문제로 인해 해외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거나 기술을 이전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엄격한 규제와 복잡한 승인 절차로 인해 신속한 기술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신약 기술수출은 국내 제약사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지만, 이 과정에서 국내 활용 기회가 줄어들고 핵심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간 국내 신약 기술이전 성과 53건 중 45.2%인 24건이 해외로 이전됐으며, 전체 기술료 수익 14조 8828억 원 중 98.6%(14조 6707억 원)가 해외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 신약개발을 위한 단계적 허가·승인 기준이 부족하고, 국내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신약개발 규제 완화 및 무분별한 해외 이전 방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국내에서 개발한 신약의 임상시험을 진행하려 해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승인 절차가 길고 복잡해 해외에서 먼저 임상을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김석관 선임연구위원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현재 한국 바이오 산업은 엄격한 규제와 복잡한 승인 절차로 인해 신속한 기술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해결을 위해선 혁신 기술의 상용화를 지원할 수 있는 선제적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러한 비판에 힘입어 최근 규제 개혁이 아닌, 규제 철폐 수준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이 뛰어야 경제가 살아난다"며 진정한 수요자 중심의 '우선 허용, 사후 규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오 시장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들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고 있다"며 "경제를 살리려면 결국 기업이 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글로벌 경제 환경과 비교하며 정부의 규제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AI, 바이오, 핀테크, 로봇 등 첨단산업과 XR, 웹툰, 애니메이션, E스포츠 같은 창조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업들이 자유롭게 혁신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기업 혁신을 지원하겠다며 도입한 규제샌드박스 역시 비효율적인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크다. 규제샌드박스는 신기술 및 신사업 모델을 일정 기간 기존 규제에서 면제하거나 유예해 혁신을 시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승인 과정이 복잡하고 소요 시간이 길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 2021년까지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410건의 과제가 승인됐지만, 이 중 실제 사업화에 성공한 사례는 1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규제샌드박스는 규제 완화의 일환으로 도입됐지만 선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탈락되는 경우가 많다"며 "규제를 보다 유연하게 완화해야 혁신적인 서비스가 성장하고, 경쟁이 활성화되면서 결국 국내 금융 산업 발전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경제 성장과 혁신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규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은 기업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규제 전환이 아니라, 규제 철폐 수준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와 국회가 네거티브 규제 체계를 재정비하고, 기업들이 자유롭게 혁신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규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원소연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원인과 본질에 대한 분석 없이 일괄적인 규제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어 기업들이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힘들다"며 "규제로 시장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의도보다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게 이상적인 정부의 역할"이라고 피력했다.

뉴스웨이 양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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