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객들은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메모리 반도체 공급업체들의 가격 정책을 비판하며 남긴 말이다. 미국 마이크론만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했고 다른 업체들은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요구한다는 불만이었다. 메모리 공급 부족으로 가격 협상력이 공급업체에 기울어진 상황에서 고객사들이 느끼는 부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이를 가볍게 넘기기는 어렵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로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양사의 협상력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실적 측면에서는 반가운 흐름이지만, 고객사 입장에서는 치솟는 메모리 가격이 부담이다. 공급 부족이 장기화하고 가격 상승 폭까지 커질수록 고객사들이 기존 공급망 밖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유인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 대안 가운데 하나가 중국이다. 머스크는 중국이 2028년 막대한 규모의 메모리를 생산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최근에는 애플이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을 시험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실제 채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객사들이 중국산 메모리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지금은 한국산 메모리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고객사라도 공급난이 완화되고 선택지가 늘어나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더욱 경계해야 할 대목은 중국이 저렴한 가격만을 앞세우는 경쟁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CXMT는 D램 생산 기술을 고도화하고 서버용 제품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한편, 차세대 기술인 '4F²' 구조에도 도전하고 있다. 기술 수준과 양산 능력에서 한국 기업과의 격차가 여전하더라도 중국이 범용 제품을 넘어 고부가 시장으로 진입하려는 움직임은 분명하다. 가격 경쟁력에 기술력이 더해진다면 한국 기업이 마주할 위협의 성격도 달라진다.
물론 중국의 추격이 당장 메모리 시장의 판도를 뒤집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첨단 D램과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성능뿐 아니라 품질, 수율, 전력 효율, 안정적인 공급 능력까지 뒷받침돼야 한다. 고객사별 검증과 제품 최적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AI 서버에 들어가는 고성능 메모리는 단순히 가격이 저렴하다고 공급처를 바꾸기 어려운 시장이다.
하지만 중국산 제품이 한국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준에 도달해야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객사 입장에서 공급처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가격 협상에서 활용할 카드가 생긴다. 중국산 메모리가 일부 제품군에서라도 대안으로 자리 잡으면 한국 기업들이 누려온 공급 우위와 가격 협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중국의 추격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당장의 기술 격차보다 그 격차가 좁혀졌을 때 고객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들이 중국을 의식해 무작정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격 경쟁에 끌려가기보다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다. 성능과 전력 효율을 높이는 것은 물론, 까다로운 고객사 요구에 맞춘 제품 설계와 안정적인 양산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결국 고객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한국산 메모리를 선택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HBM과 서버용 D램을 중심으로 성능 개선과 고객 맞춤형 제품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메모리 호황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지금은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차세대 기술과 생산 역량에 투자해 경쟁 우위를 굳힐 기회다. 시장이 좋을 때 벌어들인 이익을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미래 수요에 대비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가 다음 경쟁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공급 부족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은 고객사들이 메모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지만, 공급이 늘고 대체재가 등장하면 경쟁의 방향은 달라진다. 공급업체가 가격을 주도하는 시장에서 고객이 공급업체를 선택하는 시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갈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의 추격을 영원히 막을 방법은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기술 격차가 좁혀지는 순간 고객까지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머스크의 발언을 단순한 가격 불만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고객은 지금의 가격뿐 아니라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까지 함께 계산한다. 한국 반도체가 지켜야 할 것은 메모리 호황이 가져다준 높은 가격이 아니라, 호황이 끝난 뒤에도 고객이 한국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경쟁력이다.
뉴스웨이 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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