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는 유승목에겐 묘한 작품이다. 1990년 극단 가교 단원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연극 무대에 있던 동안 가장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가 ‘해무’였단다. 하지만 인연이 없었는지 정작 그의 고향인 ‘연극’으론 만남이 없었다고. 이후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영화로 조우하게 됐다.
“이게 참 묘했어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 먼저 달려든 작품은 이번 ‘해무’가 처음이었어요. 아는 분이 ‘봉준호 감독님이 새 작품 한다고 하는데 연락 드려봐라’라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그런 스타일도 아니고, 또 감독님께 예의도 아닌 것 같고 말았는데, 그 지인 분이 ‘너한테 어울릴 역할이 있을 걸’이라고 하시는거에요. 이후에 다른 지인한테도 얘기를 들었고. ‘해야 하는 건가’란 생각에 감독님께 ‘문자’를 드렸죠. ‘제가 할 역할이 있으면 하고 싶다’고. 하하하.”
봉준호 감독과는 ‘살인의 추억’에 참여했던 이후 인연을 이어왔다. ‘해무’의 연출을 맡은 심성보 감독은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작가다. 이른바 ‘인맥’으로 뭉치게 됐으니 출연을 결정된 사안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그에게 제의된 배역은 단역이었다고.
“경구 역을 맡은 배우분이 스케줄 문제로 못하게 되셨어요. 그런데 경구역할에 참 눈길이 가더라구요. 그냥 내가 하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돋아났다고 할까. 이런 경험도 처음이었어요. 심성보 감독님께 제가 경구를 잘 할 수 있는 이유는 장문의 문자로 보냈죠. 그리고 봉준호 감독님과 심성보 감독님 두 분 모두 흔쾌히 오케이를 하셨죠. 글쎄요. 인연이었나봐요.”
그렇게 만나게 된 ‘경구’는 ‘해무’ 속 전진호 선원 6명 가운데 가장 중심을 잡아 가는 인물로 잡혀 가고 있었다. 경구를 기준 점으로 인간적인 면을 지키고 싶은 ‘인간파’, 본능에 충실한 ‘본능파’로 나뉜다. 그렇게 보자면 ‘경구’란 인물은 참 복잡한 캐릭터였다. 현실과 본능을 오가는 현란함이 묻어있었다.
“경구를 기준으로 해무가 오기 전의 인물들과 오고 난 후 인물들의 감정이 나뉘게 되요. 경구는 그 변화하는 감정의 딱 기준 선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 강하죠. 사실 경구는 물고기로 치면 피라미에요. 몸집이 큰 물고긴 먹이를 바로 물지 않아요. 주위를 신중하게 맴돌다 한순간에 잡아채요. 하지만 피라미가 그런가요. 생각 없이 먹이를 물죠. 뭍에 잡아 올려놓으면 철퍼덕철퍼덕 요란스럽게 몸을 뒤집고. 바로 그런 느낌이 경구라고 생각했어요. 참 묘한 인물이에요.”
외적으로도 유승목은 경구에게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갑판장으로 나온 김상호가 촬영 중 실제 뱃사람으로 오해를 산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유승목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재미있는 뒷얘기는 그를 동남아 뱃사람으로 봤다는 것. 유승목은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크게 웃었다.
“우선 헤어스타일이 특이하니깐 많이 들 보시더라구요. 머리는 제 아이디어로 그렇게 했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경구의 느낌이 그렇게 다가왔었죠. 분장을 하고 바다에 있는 배에서 촬영 후 육지의 대기실로 오는 데 그때 안전요원 한 분이 절 가로 막는거에요. ‘아무나 들어오시는 데 아닙니다’ 그러는데, 거 되게 기분 좋데요. ‘어 날 몰라보네’ 이 생각이 드니깐 내가 영화에 많이 녹아들었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기분 좋았죠.(웃음)”
사실 그 헤어스타일 때문에 두 딸들과는 웃지못할 실랑이도 있었단다. 연기 생활 이후 가장 파격(?)을 추구한 그의 노력이 감수성 예민한 딸들에게는 좀 미안한 부분이었다고. 특히 둘째 딸은 함께 외출조차 꺼렸다며 웃었다. 한 번은 함께 나들이를 가는 데 “모자!!!”란 말에 황급히 집으로 올라가 모자를 찾아 쓰고 내려왔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는 헤프닝이다. 하지만 진짜 고됐던 건 아무래도 최악의 촬영 현장이었다. ‘해무’는 영화 전체의 70% 이상을 실제 바다 위 배에서 촬영했다.
“진짜 그 부분은 고개가 저절로 저어질 정도에요. 진짜 힘들었어요. 촬영 시기가 한 겨울인데, 바다 위에서 촬영을 하니 진짜 오금이 저릴 정도였죠. 바닷바람에 바닷물에 진짜 한 마디로 ‘끝내’줬어요.(웃음) 거기에 배멀미까지 오니깐 이건 뭐 하하하. 근데 진짜 신기한게 시간이 지나니깐 그것도 적응이 되더라구요. 나중에는 그것도 촬영의 일부라고 생각하니깐 재미가 있더라구요.(웃음)”
‘해무’가 주목 받은 것은 아무래도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이다. 김윤석 문성근 김상호 이희준 박유천 한예리 등 충무로에서 ‘연기’로만 말하자면 ‘도’가 튼 배우들이 모두 모였다. 유승목 역시 대중들에게만 낯설 뿐 이미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파란 점은 영화계 관계자들에겐 완벽한 ‘팩트’다. 그는 인상 깊었던 인물로 김윤석과 박유천을 꼽았다.
“연극 무대 족보가 있어요. 다른 분들은 직간접적으로 다 알고 지냈죠. 그런데 김윤석 선배님과 박유천은 이번에 처음 함께했죠. 우선 김윤석 선배님은 그냥 선장 철주 그 자체였어요. 어떻게 말로 설명이 안되요. 그냥 ‘왜 저 사람이 지금 최고인지 알겠다’는 느낌이 저절로 와요. 후배들 챙기시는 것도 얼마나 살뜰하신지. 박유천은 사실 그렇게 유명한 친구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우리 딸이 깜짝 놀라더구요.(웃음) 그 고생스런 현장에서 그냥 막내였어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굳은 일 도맡아 하는데, 진짜 대단한 친구란게 온 몸으로 느껴졌죠.”
인터뷰 내내 유승목은 ‘해무’에 대한 애착으로 똘똘뭉쳐 있었다. 유승목이 ‘해무’고 ‘해무’가 유승목 자신이었다. 그는 인터뷰 순간에도 귓가에서 심성보 감독의 ‘컷’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현장이 그립고 다시 가고 싶다며 창밖을 바라보기도 했다. 열정 혹은 본능 아니면 배우로서의 의무감, 이런 것들로만 표현하기에 유승목의 ‘해무’는 너무도 특별했다.
“내 연기 인생에 분명 전환점이 되고 또 기억에 너무도 또렷이 박힌 작품이 됐어요. 온갖 감정이 다 들어요. 그 동료들과 함께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현장에서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녹여볼 수 있을까. 별 생각이 다 들죠. 배우를 하면서 별다른 행복을 찾는 건 우스운 것 같아요. 이런 좋은 작품 만나면 정말 헤어지기 싫어요. 그 멤버들과 함께 다시 할 수 있다면 전 만사 다 제쳐두고 무조건 달려갈 생각이에요.”
유승목은 ‘해무’를 두고 ‘삶’이라고 표현했다. 111분의 시간 속에 인생을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고 전한다. 욕심 때문에 선택의 결과에 후회하고 때론 그 결과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좀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게 인간의 인생이라고 유승목은 설명했다.
인터뷰 후 유승목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메시지가 휴대폰으로 전달됐다. 즐거운 시간이었고, 다음에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진심이 묻어나는 배우 유승목, 그의 연기와 말 그리고 행동에선 그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해무’를 통해 유승목의 진가를 보게 된다면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승목의 존재를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게 아쉬울 정도다. 이 배우 정말 묵직하다.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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