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은 2일 오후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측)에 1-0 승리를 거뒀다.
첫 금메달과 두 번째 금메달은 1970년과 1978년에 나왔고 모두 방콕에서 획득했다. 1970년 대회에서 우리 대표팀은 4강에서 연장전 끝에 일본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당시 대표팀은 전반 막판 정강지의 선취골과 연장 후반 박이천의 결승골을 앞세워 2-1로 이겼다.
일본을 꺾은 우리나라는 버마(현 미얀마)와 결승에서 만났다. 당시에는 강팀으로 불렸던 버마는 이 대회 8강 리그에서 우리나라와 맞붙어 1-0으로 이긴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양 팀이 연장전까지 한 골도 주고받지 못해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
1978년 대회에서는 4강에서 중공(현 중국)을 꺾었다. 특히 이 경기는 ‘공한증’이라고 흔히 부르는 중국의 한국 축구 공포증이 시작된 경기다. 이 경기에서는 ‘갈색 폭격기’로 명성이 높았던 차범근이 후반 초반 결승골을 넣으면서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결승에서는 이라크를 꺾고 올라온 북측을 맞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역시나 1골도 넣지 못했다.
1970년과 1978년 아시안게임은 각각 한국과 미얀마, 남북의 공동 금메달로 마무리됐다. 공동 금메달을 수여한 것은 특유의 규정 때문이다. 당시 아시안게임 축구 규정에는 승부차기가 없었다. 아시안게임 축구 규정에 승부차기가 도입된 것은 1986년 대회부터였다.
1986년 안방인 서울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8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란을 꺾고 4강에서는 최순호의 활약에 힘입어 인도네시아를 4-0으로 대파했다.
이어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결승전에서는 조광래와 변병주의 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하면서 사상 첫 단독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이 대회 이후 금메달은 물론 결승전 문턱을 밟아보기 까지는 무려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0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4강에서 이란과의 연장 접전 끝에 0-1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 대회에서는 동메달 결정전에서 태국에 1-0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4강 잔혹사는 4년 뒤 히로시마에서도 되풀이됐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는 4강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일격을 당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에 1-2로 패해 노메달의 설움을 안았다.
1998년 방콕 대회는 ‘참사’로까지 불렸다. 당시 우리 대표팀은 8강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되던 홈팀 태국을 만났다. 그러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졸전 끝에 골든골을 얻어맞고 패퇴했다. 당시 감독을 맡았던 허정무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2002년 부산 대회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는 중동 팀의 위세에 눌려 결승 진출에 연달아 실패했다. 2002년 당시 대표팀은 4강에서 이란을 만나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2006년 도하 대회 당시 대표팀은 중동의 복병 이라크에 0-1로 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이란에게도 0-1로 져 4위에 머물렀다.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는 박주영까지 합류시켰지만 4강에서 아랍에미리트에 지면서 결승의 꿈을 접었다.
인천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중동 국가를 딱 한 번 만났다. 예선에서 말레이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라오스와 한 조가 된 우리나라는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서 연승을 거뒀다. 옥에 티라면 사우디아라비아 전에서 김신욱과 윤일록이 부상을 당한 점이었다.
이후에도 우리 대표팀은 홍콩(16강)과 태국(8강), 일본(4강)을 상대로 무실점 경기를 펼치며 연달아 승리했고 결승전에서 기적 같은 임창우의 결승골로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무려 28년의 세월을 돌아 온 여정이었다.
정백현 기자 andrew.j@
뉴스웨이 정백현 기자
andrew.j@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