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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서 배운 先代 회장, 中서 답 찾는 이재용

[三星 이재용 時代]日서 배운 先代 회장, 中서 답 찾는 이재용

등록 2014.11.11 07:44

정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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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삼성 키우려면 일본 기술력 배워야”이 회장도 위기 때마다 일본서 경영 구상1, 2세가 일본에서 중흥 기반 마련했다면이 부회장 중국통해 미래사업 방향성 찾아

이재용 시대로 접어드는 삼성이 아시아 최대 시장이자 세계 경제의 한 축인 중국 시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 부회장은 최근 들어 시진핑 국가주석과 마카이 부총리 등 중국 정계 최고위 권력자들을 잇달아 만나면서 현지 사업에 대한 큰 애착을 드러냈다. 이 부회장은 “중국 정부의 움직임에 따라 중국에서 사업을 확장할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을 중국 정부에 전한 바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최근 행보를 보면 할아버지 고 호암 이병철 창업주와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호암과 이 회장은 삼성 발전 기반의 답을 일본에서 찾으려 했고 이 부회장은 일본보다 중국을 더 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호암과 이 회장 부자는 ‘경제대국 일본을 잘 알아야 우리나라를 부자로 키우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신념의 기반은 학벌에 있다. 호암은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중퇴했고 이 회장은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일본 유학파 출신이다.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이 많고 일본의 첨단 기술력이 우리보다 앞선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자(父子)였다.

호암-이건희 부자는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선진경제를 받아들였고 한 발 앞선 실적을 내고 있는 만큼 항상 배워야 한다는 뜻을 강조해왔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일본에 대적할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40년 전에는 모든 방면에서 일본이 우리를 앞섰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삼성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자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기업과의 제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암은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1966년)’의 책임을 지고 그룹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복귀한 1968년 전자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호암은 삼성의 항구적 발전을 위해서라면 전자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고 치밀한 준비 끝에 삼성전자를 출범시켰다.

삼성전자의 설립 과정에서도 호암은 일본의 힘을 끌어들였다. 당시 일본 굴지의 전자 기업이었던 산요와 NEC(일본전기)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삼성NEC(현 삼성SDI) 등 삼성그룹 내 전자 계열사 3사의 설립에 큰 도움을 준 기업 중 하나다.

일본 자본을 국내에 들여온다는 것에 대해 비판적 시선이 강했던 상황에서 호암이 전자 사업 창업 과정에서 일본 자본을 끌어들인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부강하게 키우고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호암은 일생의 최대 목표였던 반도체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 샤프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반도체 개발 기술 자립화의 기반을 닦았고 현재는 일본의 여러 전자 기업을 물리치고 세계 유수의 전자 기업으로 성장했다.

호암이 일본 자본과의 협력을 통해 삼성전자를 만들었다면 2세대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 일본을 자주 오가면서 경영 구상을 해왔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중반 매년 두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출장을 떠나 현지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미래 해답을 찾았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영 사정이 위기론에 봉착할 때마다 일본에서 답을 찾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 사업의 진화와 자동차 사업이었다. 자동차 사업은 비록 실패로 귀결됐지만 반도체 사업은 일본과의 꾸준한 협력 끝에 글로벌 시장에서 ‘끝판왕’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사실 이재용 부회장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년 시절 일본 경제를 공부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논문 주제로 ‘일본의 산업 공동화’를 설정했다. 중국사 중심의 동양사학과에서 일본 관련 논문을 낸 것은 가풍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랬던 그가 변혁기 해답의 대안으로 중국을 꼽은 것은 시대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거 삼성의 중흥기 시절 일본은 첨단 산업의 메카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우리나라에 일부 역전되는 처지가 됐다.

산업 후진국이었던 중국은 무서운 자본과 인구의 힘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산업 수요는 무궁무진하며 투자할 공간도 많다. 이 때문에 미래를 한 단계 더 키우기 위해 중국 시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개인적으로도 중국과 인연이 깊다. 특히 시진핑 주석과 매우 가까운 관계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상무 시절이던 지난 2005년 수원사업장에서 시 주석을 처음 만난 뒤 여러 차례 접견하며 서로의 공감대를 공유해왔다.

지난 5월 반도체공장이 완공된 중국 산시성 시안 지역은 시 주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특히 삼성 반도체공장의 설립 과정은 중국에 투자한 해외 기업으로는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의결 과정이 빨랐는데 여기에는 이 부회장과 시 주석의 인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정백현 기자 andrew.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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