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웃을 일이 많지 않다.
살기가 팍팍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삶의 굴레 안에서 하루하루 버틴다. 혹자는 먹고 살기 바빠서, 비루한 삶에 쫓기느라 웃을 일이 없다고들 한다.
그런데 최근 웃을 일이 많아지고 있다. TV 속 시원한 풍자 덕에 통쾌한 웃음을 터트릴 기회가 많아지고 있는 것.
사회적 현실과 세상 풍조 그리고 인간 생활의 결함 악폐(惡弊) 불합리 우열(愚劣) 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嘲笑的)인 발언. 이는 풍자의 사전적인 의미다.
출발은 지난 6월 종영한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극본 정성주, 연출 안판석, 이하 ‘풍문’)이 끊었다. ‘풍문’은 상류층 집안의 속물의식을 절묘하게 꼬집으며, 자상하고 근엄한 상류층 부부의 위선적, 속물적 근성을 조용히 비췄다. 이들을 은근하게 웃음거리로 만들며 시청자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긴 것.
사실 평일 저녁 드라마에는 멜로 장르가 필수다. 이는 시청률과 직결되기 때문. 물론 드라마에는 대부분 재벌을 비롯한 상류층이 등장한다. 당연히 재벌이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가난한 여자와.
이처럼 백마 탄 왕자님과 신데렐라 스토리는 멜로드라마의 기본 공식처럼 여겨졌다.
그렇기에 상류층의 이중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풍문’의 제작 소식이 전해지자 일각에서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풍문’은 상류층이라 일컫는 ‘갑(甲)’의 돈과 권력에 얽힌 민낯을 파헤쳤다.
‘풍문’은 소위 대박을 기록했다. 음울한 시선으로 극을 비추었지만 웃음으로 귀결되었다. 시청자는 ‘풍문’을 통해 풍자의 맛을 봤다. 재미를 느낀 것이다.
◆ 가면 쓴 상류층 풍자한 ‘가면’
SBS는 ‘풍문’ 흥행 이후 본격적으로 상류층 풍자에 나섰다.
현재 방송 중인 드라마 ‘가면’과 ‘상류사회’ 역시 상류층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드라마 모두 삼각관계에 얽힌 남녀가 사랑하는 이야기라는 구조를 차용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상류층에 대한 풍자가 저변에 깔려있다.
‘가면’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 변지숙(수애 분)이 자신과 같은 얼굴을 지닌 상류층 서은하(수애 분)의 삶을 살게 되면서 겪는 일을 그렸다. 빚을 갚기 위해 자신과 똑같이 생긴 서은하의 삶을 택한다.
변지숙은 가면을 쓰고 상류층에 진입한다. 성공을 위해 사랑 없이 재벌가 여성과 결혼한 민석훈(연정훈 분)이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 속에 변지숙은 억눌린 욕망을 터뜨린다.
드라마는 변지숙이 겪는 일련의 일을 통해 상류층 이면에 감춰진 이중적인 모순을 꼬집는다.
‘가면’의 부성철 PD는 “현대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드라마다. 순둥이 소녀가 이상한 토끼를 따라서 상류 사회 체험 후 가족으로 귀환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 ‘상류사회’ 상류층 위선 그렸다
‘상류사회’는 제목에서 말해주듯 상류사회의 이야기를 그린다.
‘상류사회’는 황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재벌딸과 황금사다리를 오르려는 개천용, 두 사람의 불평등한 계급 간 로맨스 표방한 드라마다. 재벌 2세 장윤하(유이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개천에서 난 용’ 최준기(성준 분)이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려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여기에 또 다른 재벌 2세 유창수(박형식 분)과 정규직이 되는 것이 일생의 꿈인 가난한 여성 이지이(임지연 분)이 로맨스를 이룬다. 이처럼 네 남녀는 애정 관계로 얽힌다.
‘상류사회’는 제목처럼 상류사회의 삶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제로 둔 것은 정략결혼. 드라마에서 상류층 등장인물은 직업의 귀천을 따지고, 가난한 이의 상류층 진입을 봉쇄한다.
장윤하와 유창수가 있는 상류사회는 최준기나 이지이가 올려다볼 수 없는 곳이자, 사람을 ‘급’에 나누는 냉혹하고 비참한 세계다.
드라마는 화려한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쓰디쓴 상류사회의 이면을 기본적인 플롯으로 차용했다.
또한 ‘가면’과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재벌 회장에게 각각 내연녀가 있고, 그 자식들이 경영권 분쟁에 나서며 내재된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같다. 가난한 등장인물이 상류사회의 비릿함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점 역시 같다.
드라마는 정략결혼과 불신, 돈으로 무엇이든 해결하려는 행동, 자본과 관계 속에 갇힌 외로움 등 상류층의 생활을 풍자한다. 이는 어쩐지 통쾌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호기심과 판타지, 풍자를 모두 충족하는 것.
살인과 치정 등 막장 구조를 어느 정도 품고 있지만,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줄타기 하며 재미를 주고 있다. 두 드라마 모두 10%대 전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방하고 있다.
◆ 권력과 자본의 두 얼굴 ‘어셈블리’
대한민국에서 재벌을 제외한 대표적인 상류층은 정치인이라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기득권층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일 때면 대중의 저격 대상이 된다.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급급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정치인도 있다.
KBS ‘정도전’, ‘징비록’ 등을 집필한 정현민 작가는 10여년 간 여당과 야당을 오가며 보좌관 생활을 했다. 앞서 사극에서 정치에 기반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재미를 주던 정 작가가 날 것 그대로의 정치드라마를 표방한 ‘어셈블리’를 집필한다.
지난 15일 첫 방송 된 KBS2 수목드라마 ‘어셈블리’(극본 정현민, 연출 황인혁)는 정치의 본산이자 민의의 전당 국회를 배경으로 한 휴먼 정치 드라마이다.
친청(친청와대)파 리더 백도현 의원(장현성 분)과 반청파 박춘섭 의원(박영규 분)은 보궐선거 공천을 놓고 대립한다. 바둑판에 돌을 놓는 듯 정치고수들의 수 싸움이 이어지는 것. 여기에 용접공 출신으로 회사에 맞서 투쟁하던 진상필(정재영 분)의 정치 도전이 서막을 알렸다.
악덕 사업가(조재현 분)는 정치 컨설턴트 최인영(송윤아 분)에 “법은 왜 국민을 위하지 않나”라고 묻는다. 자신의 배 불리기 급급한 악덕 사업가가 하기엔 참으로 모순적인 대사.
이처럼 정현민 표 정치드라마는 곳곳에 신랄한 풍자가 자리한다. 그동안 사극을 통해 대한민국의 현실을 풍자하는 대사와 상황을 배치해 풍자를 서슴지 않았던 정현민 작가가 ‘어셈블리’를 통해 보여줄 풍자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권력과 자본, 기득권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기대해본다.
◆ 풍자 품은 TV, 좋지 아니한가
TV에서 풍자를 마주하는 일은 유쾌하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뉴스웨이에 “대중은 드라마를 통해 재벌의 생활을 보는 일에 익숙하다. 평소 접하기 힘든 상류층의 생활을 보며 동경하기도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삶이 그려지는 자체가 재미를 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재벌의 부유함이 주는 대리만족이나 극중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를 통해 좋은 모습을 보며 열광했던 대중이 이제는 상류층의 어두운 이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더 가까이서 보고자 하는 심리가 일종의 트렌드가 된 것”이라고 바라봤다.
풍자는 더 이상 머리 아픈 일이 아니다. 학창시절 보물찾기에서 발견한 선물 쪽지처럼 드라마 속 현실 풍자는 기분 좋은 재미와 웃음을 안긴다.
미니시리즈 속 풍자는 멜로에서 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터. 상류층이 주로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에서 온 변주라도 봐도 무방하다. 그들의 사랑 안에도 풍자가 깔려있는 것.
상류층과 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해 유쾌하게 승화시킨 TV는 진화했다. 사랑 타령만 하는 드라마는 이제 없다. 시청자의 니즈(NEEDS)는 다양해졌고 단순히 울고 웃기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아한 풍자는 시청자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여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토록 즐거운 풍자가 있어 좋지 아니한가. [사진=SBS, KBS]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ssmoly6@newsw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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