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감성, 대쪽의 지성으로 민족의 영혼에 영생하소서...
문병란 선생님, 1960년대 말 철부지 고등학생으로 선생님께 국어를 배운 제자가 선생님 앞에 섰습니다. 야위고 키 큰 미남이셨던, 그러나 말씀과 글이 외모보다 더 깔끔하고 아름다우셨던 선생님을, 저희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말과 글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말과 글은 한없이 정갈하고 어느 경우에건 가장 적확해야 한다는 것을, 맨 처음 깨우쳐 주신 분이 선생님이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선생님의 품을 떠났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희들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말과 글을 배운 것은 저희들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꼭 말씀 드리고 싶었지만, 이제야 말씀 올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때 저희들은 선생님의 감성과 정신의 세계를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습니다. 저희들은 미처 몰랐지만, 그 무렵에 이미 선생님의 가슴 속에는 정의가 폭포처럼 흐르고, 저항이 칼날처럼 솟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민중과 민족이 처한 현실을 처절하게 직시하며, 민중과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정의와 저항의 혼을 심으려 하셨습니다.
1960년대 군사통치 시절에 선생님은 “백주의 무법 앞에, 알몸으로 떨고 있는 꽃이여···차라리, 찬란한 밝음을 갈갈이 찢어버려라”하고 조국과 민중의 현실 앞에, 벨 듯이 칼날을 세우며, 폭포를 쏟듯이 항거하셨습니다.
1970년대 유신 시절에는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며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라고 분단의 설움을 노래로 승화하며, 통일에의 노력을 민족의 가슴에 호소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그런 활동이 얼마나 순수한 것이었는지를, 저 무도한 사람들은 알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1980년 광주가 군화에 짓밟히고 총칼에 피 흘렸을 때, 선생님은 ‘폭도’라는 턱없는 죄목으로 고초를 당하셨고, 그 결과로 선생님은 오히려 더욱 굳건해지셨습니다. 선생님은 “오늘 이 땅에는 남의 총, 남의 깃발이 길을 막는다”고 조국의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며, 피를 토하는 듯한 유훈 같은 가르침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처럼 치열하게 시대에 마주 서면서도, 선생님은 깔끔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노을 지는 꽃길 위에, 종종걸음으로 왔다가 스러지는 무수한 발자국”이라고 민초의 하릴없는 삶과 꿈을 연민의 눈으로 보듬고, 아름답게 이름붙여 주셨습니다.
이렇듯 선생님은 저항하면서도 서정을 놓지 않고, 비판하면서도 미학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선생님은 ‘꽃의 감성’과 ‘대쪽의 지성’을 겸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민중의 사랑과 믿음을 오래오래 받으시는 바탕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은 선생님을 먼 곳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그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꽃의 감성’과 ‘대쪽의 지성’으로 우리 민중과 민족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중과 민족은 선생님을 잃었지만, 선생님께서 남기신 ‘꽃의 감성’과 ‘대쪽의 지성’은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후대는 선생님께 ‘민족시인’이라는 칭호를 바칩니다. 민족시인 문병란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을 사랑하신 민중과 민족의 영혼에 ‘꽃의 감성’으로, ‘대쪽의 지성’으로 영생하소서.
한편 고 문병란님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참여시를 꾸준히 발표해 온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인은 조선대학교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5·18기념재단 이사,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고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수배를 당하고 농업협동조합에서 간행된 시집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의 시에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선 굵은 민중시가 돋보이는 것도 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호남 노상래 기자 ro1445@
뉴스웨이 노상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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