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을 만나러 가는 길. 궁금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기자들을 대할지, 무슨 말을 꺼낼지 취재진의 눈은 그의 입을 향했다. 이병헌이 언론에 온화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많은 일을 겪은 이병헌이었다.
지난해 이병헌은 20대 여성 두 명이 동영상을 빌미로 50억을 요구한 협박 사건에 휘말렸다. 이와 관련한 내용이 공개되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류스타를 넘어 헐리웃 스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병헌이었기에 이 과정은 큰 타격이었다.
이병헌은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제네시스’와 ‘협녀:칼의 기억’을 통해 관객과 만났지만 홍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 일정이 이유였지만, 그에게 무리해서 얼굴을 보여달라 요구하는 이는 없었다. 지난 3월에는 첫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이 역시 조용히 지나갔다. 그렇게 많은 일을 겪고 많은 것을 느낀 이병헌이었다.
이병헌은 영화 ‘내부자들’(감독 우민호)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 나섰다. ‘내부자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움직이는 내부자들의 의리와 배신을 담은 범죄드라마이다. 이병헌은 대기업 회장과 정치인에 이용당하다 폐인이 된 정치깡패 안상구 역을, 조승우는 빽도 족보도 없이 근성 하나 믿고 버텨온 무족보 열혈 검사 우장훈 역을, 백윤식은 국내 유력 보수지 정치부 부장을 거친 현역 최고 논설 주간위원 이강희 역을 각각 연기한다.
'내부자들'은 윤태호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파괴된 사나이', '간첩'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이병헌이 분하는 안상구는 한 때 권력의 그림자 이강희와 손 잡고 재벌, 정치인 등 힘 있는 자들의 수하가 되어 그들의 뒷거래를 도와주던 정치깡패였다. 그러나 이강희가 붙여준 별명 ‘여우 같은 곰’처럼 더 큰 성공을 위해 머리를 쓰다 모든 것을 잃고 버려진다. 절치부심하던 안상구는 자신을 배신한 이들을 거꾸러뜨리기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영화에 배우 이병헌은 없다. 안상구만 있을 뿐이다. 작품에서 이병헌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몰입으로 캐릭터와 혼연일체된 연기를 보인다. 안상구의 눈빛으로 액션의 디테일까지 살리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로지 안상구만 영화에 있을 뿐이다. 25년 연기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러나 이병헌은 처음부터 안상구가 마음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안상구가 가장 별로였어요. 백윤식이 연기한 이강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죠. 캐릭터란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뻔한 캐릭터라 할 지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유난히 그런 기대가 두드러지는 캐릭터들이 있어요. 안상구가 그랬죠. 초기 시나리오에는 유머가 없었어요. 나중에 감독님께 다양한 의견을 어필하며 애드리브나 아이디어를 첨가해서 완성시켰죠.”
안상구는 무서운 얼굴을 하다가도, 순박한 청년으로 돌변해 순수하고 코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병헌은 멋진 수트를 빼입고 등장해 날선 카리스마를 발산하더니, 올백 더벅머리에 펑퍼짐한 점퍼를 입고 순박 총각으로 변신한다. 이병헌이 느끼는 안상구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여러가지 모습들이 보여져서 좋았어요. 나쁜 직업을 가졌지만 더 나쁘고, 덜 나쁘고의 차이죠. 안상구는 덜 나쁜 사람이었을거에요. 덜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죠. 제 딴에는 여우라 생각하지만, 극 중 이강이의 대사처럼 ‘여우 같은 곰’ 인 거죠. 계속 뒷통수 맞고 당하죠. 그런 면이 부각되어 더 매력적이었어요. 그렇지만 살벌한 짓을 하는 것도 일상이 된 안상구에요. 부하들의 가족을 돌보고 후배를 상각하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도끼와 망치를 고리며 노래를 흥헐거리죠.”
이러한 안상구 캐릭터는 이병헌이 쉴 틈 없이 우민호 감독을 괴롭힌 결과다. 이병헌은 안상구 캐릭터를 보다 설득력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종일관 우 감독에게 아이디어를 내고 애드리브를 시도하며 애정을 쏟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빡빡하고 쉴새없이 몰아치면 관객들이 무겁게 느낄 것 같았어요. 쉬지도 못하고 보면 힘들 것 같았죠. 안상구가 그런 지점에 여지를 줬으면 좋겠다고 어필했어요.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전체적인 색깔을 바꿨어요. 작정한 것은 없었어요. 즐기면서 놀듯이 조승우와 연기했어요. 새로운 애드리브 아이디어가 있으면 맞춰보기도 하고, 서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촬영했죠. 정말 말장난이었는데 감독님이 좋다고 해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그런 분위기라 좋았죠. 웃음이 가득한 촬영장이었어요.”
처음 ‘내부자들’ 캐스팅이 발표되자 팬들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믿고 보는 배우’ 이병헌과 조승우의 만남이라니. 처음 만나는 이들의 호흡이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 지 기대를 모았다. 조승우와의 촬영은 어땠을까.
“처음에 조승우가 캐스팅 됐다고 듣고 상상이 안됐죠. 그 친구는 나와 다른 색깔의 연기를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시너지를 발할 수 있을지 상상이 안됐어요. 또 호흡이 맞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민했죠. 그런데 첫 날 촬영을 하고 ‘진짜 잘맞겠다’라는 느낌이 탁 왔어요. 아니나 다를가 촬영 할 때 제가 애드리브를 던지면 조승우가 순발력 있게 바로 받아줘요. 그렇게 탄생한 장면이 영화에 많습니다.”
‘내부자들’은 인터뷰에 앞서 진행된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되었다. 시사회 당시 객석에서 가장 큰 웃음이 흘러나온 부분은 이병헌이 여관 화장실에서 실루엣을 통해 낑낑거리며 조승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부분이다. 이 역시 이병헌의 아이디어였다.
“그 장면을 대본을 통해 읽었을 때부터 재밌었어요. 감독님께 부탁드려서 여관 화장실 유리를 통유리로 가자고 제안했죠. 현장에 갔더니 반만 유리로 됐더라고요. 그래서 ‘반만 통유리 인 것 보다 전체적으로 유리면 좋을 것 같다’라고 다시 의견을 어필했죠. 결국 네 시간이나 걸려서 가까스로 섭외를 했어요. 스태프, 배우들 모두 네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재미 없으면 나 혼자 욕을 다 먹겠구나 싶었죠. 부담이 엄청났어요. 그런데 다행히 현장에서 웃음이 빵빵 터졌어요.”
이병헌은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라는 말로 ‘내부자들’에 대한 고충과 기대감을 눌러 담았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런 영화는 처음이에요. 처음 해보는 연기가 많았죠. 사투리도 그렇고, 사회 비리를 고발하는 장르도 처음이에요. 또 많은 배우들을 처음 만났죠. 백윤식, 조승우를 비롯해 여러 훌륭한 조연들이 출연했는데, 다들 연기를 잘했어요. 이경영 씨 빼고는 거의 다 처음 호흡을 맞춘 배우들이었어요.”
이병헌이 ‘내부자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어느 때보다 궁금했다. 그는 개봉을 앞둔 솔직한 심경도 곁들였다.
“영화를 보며 씁쓸한 현실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어요. 언론 시사회가 끝나고 객석 반응을 살폈는데 다행히 좋더라고요. 조승우가 ‘형 확실히 좋다’라는 말을 건네는데 안도감이 들었어요. 관객들이 재밌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원본에서 상당부분 잘려나가서 걱정했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니 좋더라고요. 힘이 느껴졌어요.”
스캔들을 딛고 ‘내부자들’로 돌아온 이병헌이 배우로서 다시 인사한다. 관객들이 그를 배우로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병헌은 영화로 말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공들여 만든 작업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차피 연기를 한다는 것은 내 일이기도 하고, 같이 영화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란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순수하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요.”
이병헌의 이러한 물음에 이제 관객이 답을 할 차례다. 이병헌이 연기로 말한다. 약속한다.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더 많이 연구해야겠지요. 좋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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