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는 20대 여배우 기근에 시달렸다. 20대 여주인공을 잘 연기할 만한 연기실력을 가진 여배우들이 없는 게 문제였다. 예쁜 여배우는 차고 넘치게 많았지만, 작품에는 예쁜 여주인공만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함정. 다양한 배역의 옷을 소화할 수 있는 여배우가 절실했다.
배우 김고은이 등장하며 한국 영화계의 갈증은 해소되었다. 김고은은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박소담-이유영과 함께 충무로 트로이카에 등극했다. 영화 ‘은교’(2012)로 데뷔한 김고은은 ‘몬스터’, ‘차이나타운’, ‘성난변호사’, ‘협녀-칼의 기억’과 2016년 개봉을 앞두고 있는 ‘계춘할망’까지 다수의 영화에서 다양한 역할로 옷을 갈아입었다.
김고은은 수수하고 깨끗한 마스크를 지녔다. 하얀 도화지 같은 이미지와 한 없이 깊은 눈빛은 이내 배역의 색으로 채색되었다. 그렇게 그는 충무로에서 대체 불가 여배우라는 평을 이끌며 존재감을 다져왔다.
그런 김고은이 돌연 드라마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영화 ‘계춘할망’ 촬영을 마친 김고은이 케이블채널 tvN ‘치즈인더트랩’(극본 김남희 고선희, 연출 이윤정, 이하 치인트)에 전격 캐스팅 된 것. 김고은은 ‘치인트’를 통해 첫 드라마 테이프를 끊었다.
김고은은 극중 공부 잘하고 성실한 평범한 대학생 홍설 역으로 분했다. 갑자기 앞에 나타난 선배 유정(박해진 분)과 가까워지게 되면서 알 수 없는 그에게 끌리는 홍설을 연기했다. ‘치인트’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웹 상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치인트’를 사랑하는 팬들을 일컬어 ‘치어머니’라 불리울 만큼 열정적이었다. ‘치인트’ 제작 소식이 정해지자 치어머니(치즈인더트랩+시어머니)들은 가상 캐스팅을 앞다투어 내놓으며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고은이 홍설 역으로 낙점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치어머니들은 그가 홍설과 싱크로율(어떤 요소와 요소가 합쳐지면서 발생하는 것, 정확도)이 맞지 않는다며 반대를 하고 나섰다. 첫 드라마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았을 뿐더러 캐스팅에 대한 일부 팬들의 목소리에 속앓이를 했을 김고은이었다.
“저도 원작 웹툰의 팬이었기에 우려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해요. 제가 홍설 역할을 맡게 된 이상 시청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점은 내 몫이잖아요. 싱크로율이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연기를 열심히,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는 천개의 말보다 하나의 연기로 말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부 우려의 목소리에 김고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연기로 펼쳐보였다. 첫 드라마였지만 감정의 과잉 따윈 없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대학생인 홍설의 일상성을 잘 표현하며 김고은은 어느새 홍설이 되었다. 물 위의 백조처럼 수많은 발짓과 노력이 수반된 결과였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처음 드라마를 했고, 많이 힘들 것이라는 각오도 했어요. 캐스팅이 되고 나서 반(半)사전제작 시스템 제작이 결정되었죠. 다행이었어요. 그럼에도 연기적으로 집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어요. 시간에 쫓기거나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억울할 것 같았어요. 감독님께 배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허심탄회하게 부탁드렸고, 흔쾌히 걱정 말라고 해주셨어요. 덕분에 현장에서 제가 걱정했던 어려움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죠.”
김고은은 첫 드라마를 무사히 마쳤다. ‘치인트’를 계기로 드라마 작업에 좀 더 열린 마음도 갖게 되었단다. 데뷔 후 줄곧 영화 작업을 묵묵히 이어오던 김고은은 작품을 이어왔다. 사전제작이라는 비교적 좋은 촬영장에서 연기했지만 김고은은 영화와는 다른 환경임을 체감했다고 한다.
“드라마는 촬영 호흡이 빠르더라고요. 영화는 하루에 세 장면 정도 촬영하는 반면 드라마는 기본 열두 장면씩 찍었어요. 처음에는 ‘여긴 어디, 난 누구’ 했어요.(웃음) 세팅도 빨랐어요. 영화는 세팅하는데 두세시간 걸리는데 드라마는 3분이면 됐죠. 옷도 초스피드로 갈아입었어요. ‘와 대단하다’ 감탄했죠. 적응은 빨리 했어요. 나름 노하우도 터득했죠.”
김고은은 조근조근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썩 화려한 언변은 아니었지만 담백한 말속에 진심이 담겼다. 촬영 에피소드를 들으며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방청객으로 변하고 말았다. 솔직한 매력을 발견하고 실제 성격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솔직한 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고은은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했다. 감정에 솔직한 김고은은 작품 안에서 빛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감정에 솔직하고자 노력하는 점은 습관이에요. 배우라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해요. 힘든 감정이 올라올 때는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맞서야 하죠. 배우라면 그래야 해요. 그 부분에 대해 깊게 고민했어요. 배우들이 다들 그러하겠지만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조금 다른 감정이 다가오면 갑자기 집중하게 되요. 이 감정은 뭘까, 골몰하게 되거든요. 어떤 감정이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늘 영화에서 나이차가 제법 나는 선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던 김고은은 ‘치인트’를 통해 또래 연기자들과 호흡하며 또 다른 경험을 했다. 박해진, 서강준, 이성경, 남주혁 모두 대화가 통하는 청춘 연기자들이었다. 선배, 선생님들과의 작업에 익숙해져 가던 순간 만난 ‘치인트’는 또 다른 재미를 일깨웠다. 이를 짚어내자 김고은은 해맑게 웃으며 청춘 배우들과의 촬영이 즐거웠다고 미소 지었다.
“또래 배우들이 함께한 촬영장은 분위기부터 달랐어요. 에너지가 많은 분들이셨죠. 진짜 대학교에 온 것 같았어요.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학생들로 나온 배우들은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저는 촬영 분량이 많아서 아쉽게도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SNS 등을 통해 함께하는 사진을 보며 부러워했어요. 고맙게도 저를 껴줬어요.(웃음) 현장에서 투닥거리며 즐겁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김고은은 최근 건강 악화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 촬영과 연이어 이어지는 인터뷰 스케줄이 김고은의 가녀린 육체를 집어삼켰다. 결국 스케줄을 취소할 정도로 그는 부침을 겪었다. 이날 만난 김고은은 민낯에 두꺼운 점퍼로 꽁꽁 싸매고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지칠 법도 한데 이내 연기와 작품 이야기에 눈을 번쩍이며 정신을 다잡았다. 최근 김고은의 화두는 체력관리라고 했다.
“체력관리를 못한 게 아닌지 고민하고 있어요. 많이 배웠어요. 배우가 아픈 것 만큼 민폐가 되는 것도 없는데 그 말을 되새기며 일하고 있어요. 원래 촬영장에서 아픈 적이 없었는데, 영화 ‘계춘할망’ 촬영 할 때와 ‘치인트’ 촬영 할 때 아팠거든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스스로 죄책감 같은 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체력이 좋다고 자부했었는데 지금은 냉정하게 보게 되요. 운동도 하고 체력 보강을 해서 준비가 되었을 때 작품에 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고은은 이제 홍설과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첫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고은은 오는 5월 영화 ‘계춘할망’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처럼 열심히 달려온 김고은은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김고은이기에 현재를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르다.
“‘치인트’가 끝나고 홍설에게 ‘잘가라’ 그랬어요. 사전제작이라서 방송되는 드라마도 시청했는데, 보며 참 행복했구나 느꼈죠. 과정이 재밌었어요. 스태프들, 배우들 함께 장난도 치면서 투닥투닥 찍어낸 좋은 기억이에요. 첫 드라마라서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 왔지만 과정이 행복해서 다 이겨낼 수 있었어요. 첫 드라마를 정말 잘 경험한거죠. 촬영 때가 새록새록 떠올라요. 이제 홍설을 보내려고 해요. 홍설을 보내고 또 김고은으로서 다른 행복을 위해 달려야겠죠?”[사진=장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이슬 기자 ssmoly6@
뉴스웨이 이이슬 기자
ssmoly6@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