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 R&D법인 설립’ 제동 걸리자 당국, 산은에 “가급적 발언 자제” 당부 ‘철수설’ 우려한 듯···수장 교체도 부담산은 내부선 미묘한 역할 경계에 불만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지나가듯 던진 ‘뼈 있는’ 한 마디가 뒤늦게 회자되고 있다. 어디까지나 기업 구조조정은 정부가 주도할 문제고 산은은 실행자로서 협력하고 있다는 취지였지만 역할의 경계선이 존재하는 씁쓸한 현실을 돌려서 표현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흘러나온다.
이런 온도차는 최근 한국GM을 둘러싼 현안에서 양측이 미묘한 파열음을 내면서 부각되고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GM의 ‘법인 분리’ 사태를 놓고 정부와 산업은행이 온도차를 보이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GM의 장기 경영을 확답 받아야 한다는 점엔 서로 뜻을 같이하지만 산은 측은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GM(제너럴모터스)을 압박해야 한다는 생각인 반면 정부 측은 ‘철수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이들을 ‘흔들어선’ 안된다고 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산업은행은 지난달 28일 한국GM의 연구개발(R&D) 법인 설립을 둘러싼 두 번째 법적 다툼에서 ‘판정승’을 거뒀음에도 목소리를 내는 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등의 통상적인 코멘트조자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GM이 ‘파국’을 맞을 경우 난처해질 수 있는 당국의 입장을 고려해 자중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면에는 어떠한 입장도 표시하지 말아달라는 정부의 당부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지난달 28일 서울고법 민사40부(배기열 수석부장판사)는 산업은행이 한국GM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총회 의결효력 정지 신청 항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며 산은 측 손을 들어줬다. ‘회사분할’은 채무자의 권리와 의무 일부를 이전하는 행위로서 한국GM 정관상 85% 이상의 찬성을 요하는 ‘특별결의사항’에 해당하는 만큼 2대 주주(지분율 17.02%) 산은 없이 82.9%가 내린 결정은 무효라는 판단에서다.
산업은행으로서는 주주로서의 권한을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극적인 승부였다. 2심을 거치며 ‘비토권’의 영역이 명확해져 한국GM이 다시 주총을 열고 법인 분할을 추진하더라도 이를 저지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GM과의 투자 협상 과정에서 산은은 총자산의 20%를 초과하는 자산(공장·토지 등)을 매각·양도하거나 취득 시 거부할 수 있는 ‘비토권’을 회복했는데 그 내용이 모호해 그간 해석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 따라 한국GM의 R&D법인 설립 계획이 무산될 수 있다는 관측이 금융권 전반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결과에 오히려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를 빌미로 GM이 한국 사업을 접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다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GM 본사는 최근 북미 5곳, 해외 2곳 등 7곳의 공장 가동을 멈추겠다고 예고했는데 그 중 한국 공장이 포함될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만일 GM 측이 ‘철수 카드’를 다시 꺼내든다면 협상을 이끌었던 정부로 모든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것은 물론 한국GM에 투입한 자금의 회수도 불투명해질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 당국은 올 한해 굵직한 기업 구조조정 현안을 조율했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퇴임을 앞두면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취임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기존 수준으로 전열을 가다듬기까진 다소 시간이 소요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한국GM 사태가 최악으로 흘러가면 당국은 GM과 국내 여론 모두에 끌려다니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산업은행 측은 내심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GM 구조조정 작업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정부의 논리에 가로막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금호타이어나 현대상선도 마찬가지다. 실제 자금을 투입하는 쪽은 산은임에도 결재를 받아야하는 탓에 정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렇다보니 산은 내부에서는 당국의 ‘스포트라이트’ 욕심이 지나친 게 아니냐는 불만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이동걸 회장 역시 “무수히 많은 부실 대기업을 지난 정부가 산은에 떠맡기고 구조조정을 해결하지 않았다”거나 “(현대상선 지원 방안은)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 회의에서 확정되지 않아 공개하기 어렵다” 등의 발언으로 이러한 여건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산업은행이 모든 이슈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기업 구조조정이 실패하면 관련 부서로 감사 등과 같은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에 내부에서는 불편하다더라도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게 안전하다고 보는 시각도 팽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논란이 됐던 현대상선 구조조정에 대한 산은의 ‘면책 특권’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국GM을 둘러싼 정부와 산업은행의 불협화음은 여론의 관심을 의식하는 관료 특유의 욕심과 책임을 회피하려는 국책은행의 ‘보신주의’가 상충한 결과”라면서 “다만 많은 이들의 생존권이 걸린 사안인 만큼 보다 건설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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