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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 농심 일군 ‘라면왕’ 신춘호의 56년 외길

글로벌 기업 농심 일군 ‘라면왕’ 신춘호의 56년 외길

등록 2021.03.27 11:01

정혜인

  기자

형 신격호와 갈등 겪으면서도 라면사업 강행신라면·새우깡 등 제품 발판 글로벌 기업 우뚝한국 라면 세계 알려 ”韓 식품 외교관” 평가

그래픽=박혜수 기자그래픽=박혜수 기자

농심 창업주 신춘호 회장이 92세로 27일 영면했다. 신 회장은 1965년 농심을 창업해 56년간 이끌며 식품산업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라면’, ‘새우깡’ 등으로 농심을 국내 1위 라면기업에 올려놓은 데 이어 제품을 잇따라 해외에 선보이며 글로벌 기업으로까지 성장시켰다.

◇신격호 둘째 동생···롯데서 독립해 라면 사업 나서 = 농심은 “신 회장이 27일 오전 3시 38분께 지병으로 별세했다”고 이날 밝혔다. 신 회장은 최근 노환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신 회장 장남인 신동원 부회장은 지난 25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신 회장에 대해 “몸이 안 좋으시고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와 모친 김필순의 5남 5녀중 셋째 아들로,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이다. 다른 형제로는 신철호 전 롯데 사장, 신소하 씨, 신경애 씨, 신경숙 씨,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숙씨,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등이 있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 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 농심 부회장,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씨(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부인) 등 3남 2녀를 두었다.

그는 1958년 동아대 법학과 학사를 졸업한 후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한 형 신격호 명예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롯데 부사장으로 한국 사업을 이끌었다. 1962년에는 일본 롯데 이사에도 올랐다.

그는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라면사업 추진에 나섰다.

그러나 1965년 말 라면 사업 추진을 놓고 신격호 명예회장과 갈등을 겪은 끝에 라면업체 롯데공업을 설립하며 독립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라는 사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자 신춘호 회장은 1978년 롯데공업의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하면서 롯데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후 형제는 의절했고, 신 명예회장이 주최하는 가족행사나 신춘호 회장 고희연에도 서로 찾지 않았다. 지난해 1월 신 명예회장의 별세 후 빈소에도 신춘호 회장은 조문하지 않았다.

사진=농심 제공사진=농심 제공

◇1985년 국내 라면시장 1위 달성···해외서도 선풍적 인기 = 신춘호 회장은 농심 창업 이후 ‘최초’라는 타이틀을 잇따라 거머쥐었다.

농심은 1970년대 초 닭고기 육수 중심의 국내 라면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신 회장은 닭고기 대신 소고기 육수를 사용한 ‘소고기라면’으로 승부수를 던져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1971년에는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을 출시했다.

1982년 신춘호 회장은 ‘스프맛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안성에 스프공장을 준공했다. 그 결과 농심을 업계 1위로 떠오르게 한 너구리와 짜파게티가 1982년과 1984년에 각각 만들어졌다. 1985년 3월엔 회사 설립 후 최초로 시장점유율 1위를 달성했고 이후 1위 자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라면 공급업체로 선정되며 국내외에 농심의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됐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신라면은 농심을 글로벌 기업으로까지 성공시킨 역작으로 꼽힌다. 1986년 출시된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 시장을 석권하는 ‘국민라면’으로 등극했고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신춘호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한국시장에서 파는 신라면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 시장에서 일본제품보다 대부분 3~4배 비싼 가격을 유지 중이나 주요 유통채널에 입점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농심의 제품들은 지난해에는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등장한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농심은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도 갈아치웠다. 농심은 지난해 매출액 2조6398억 원, 영업이익 1602억 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12.6%, 103.4% 증가한 수치다. 특히 라면 매출이 실적을 크게 끌어올렸다. 지난해 농심의 라면 매출은 전년보다 16.3% 증가한 2조868억원에 달했다. 농심의 라면 매출이 2조원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농심 전체 매출에서 라면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9년 76.6%에서 79.0%로 늘어났다.

신춘호 회장은 농심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데 흡족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그리고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즈가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환하게 웃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라면쟁이” 장인정신 강조한 신춘호 = 신춘호 회장은 무엇보다 연구개발(R&D)과 품질, 그리고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경영인이었다.

그는 평소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하여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며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도 장인정신을 주문했다.

또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뒀다. 당시 라면사업이 이미 궤도에 올라있던 일본 기술을 그대로 도입하는 대신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내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또 안성공장을 설립할 당시에도 신춘호 회장은 국물맛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신 회장은 브랜드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이 모두 신 회장의 작품이다. 신라면 역시 당시 회사 이름을 라면에 붙이는 관행을 피하고 처음으로 한자를 이름에 도입한 제품이다. 신춘호회장이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신 회장은 1992년 회장에 선임된 이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 그룹 회장직만 맡으며 세부적인 경영 현안은 경영진들에게 맡겨왔다. 그리고 별세 이틀 전인 지난 25일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재선임되지 않으면서 경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차기 회장에는 고인의 장남인 신동원 부회장이 오를 전망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 주총에서 사내 이사로 선임됐다. 신 부회장은 1997년 농심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데 이어 2000년에는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사실상 농심 경영을 맡아왔다.

뉴스웨이 정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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