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은 총재 "목표물가 수준 확신 전까지 긴축 기조 유지"

11일 오전 '한국은행 창립 74주년 기념식'

"물가 상방 위험 여전···충분한 긴축 필요"

"지속성장 위해···사회문제 해결 방안 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물가가 목표(2%)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현재 통화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12일 '한국은행 창립 제74주년 기념사'를 통해 "1분기 GDP 성장률이 예상을 상회하는 등 경제 회복세가 우려보다 나아진 모습은 다행스럽지만 이같은 성장지표 뒤에는 수출과 내수 회복세 차이가 완연하고 내부 부문별로 체감 온도가 상이하다"며 "물가상승률도 둔화 흐름을 보이고 있지만 양호한 성장세, 주요국 통화정책 불확실성에 따른 환율 변동성 확대 등으로 상방 위험이 커진 데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어 "물가가 제대로 안정되지 않으면 실질소득의 감소, 높은 생활물가 등으로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가중될 것"이라며 "섣부른 완화기조로의 선회 이후 인플레이션이 재차 불안해져 다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 감수해야 할 정책비용은 훨씬 큰 만큼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현재의 통화긴축 기조를 충분히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너무 늦은 기조 전환은 내수 회복세 약화와 연체율 상승 등 시장불안 등을 초래할 수 있어 인플레이션과의 마지막 구간에 접어든 만큼 섬세하고 균형 있는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기준금리를 빅스텝으로 인상하던 때의 거친 풍랑은 이제 어느 정도 잦아든 듯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수면 아래 곳곳의 보이지 않는 암초를 피해 항로를 더욱 미세하게 조정해 나가야 하는 또 다른 어려움을 마주한 시기"라며 "이런 때일수록 국가별로 정책운영 성과가 차별화되어 나타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실력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겸손한 자세로 경제예측의 정확성을 높이고 다양한 시나리오별 리스크를 종합적으로 점검하면서 정교하게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통화정책 외 △분기 단위 경제전망 발표 분석(8월~) △3개월 내 기준금리 전망 공개에 대한 개선방안 마련 △CD금리 대체할 실거래 기반 무위험지표금리(KOFR) 상품 거래 장려 △한은 대출 적격담보 범위 대출채권까지 확대 등 한은의 정책사업 완수도 거론됐다. 이 총재는 위해 은행 및 비은행예금취급기관에 대한 체계적이고 예측가능한 유동성 지원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디지털 전환 대응을 위한 과제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한은은 기관용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예금토큰 등 다양한 민간 디지털 통화가 발행·유통되는 새로운 미래 금융인프라를 시범 구축하기 위해 CBDC 활용성 테스트를 추진할 계획이다.

아울러 BIS 및 7개국 중앙은행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금융인프라 연구 프로젝트(Project Agorá)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방침이다. 한은은 이를 통해 비기축통화국으로서 국가 간 지급결제 시스템의 새로운 표준을 설정하는 작업 초기 설계자(rule-setter)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공·금융기관 망분리 정책도 언급됐다. 이 총재는 "한은은 국가정보원,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등 유관기관과 협의해 공공분야 망보안 정책 개선의 첫 시범기관으로 참여하게 됐다"며 "직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제약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은의 IT 효율성과 업무 생산성이 향상되고 사이버 보안(cyber security)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또한 제고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한은의 역할이 물가 안정에 그치지 않고 △저출생 △연금고갈 △지역불균형 △소득·자산불평등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사회문제 해결 방안까지 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 노력 없이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한은은 우리나라 최고의 싱크탱크가 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총재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하더라도 높은 물가수준은 계속해서 생계비 부담으로 남아있을 것"이라며 "이는 통화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요국 대비 높은 의식주 비용을 낮추기 위해 공급채널을 다양화하고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등 근본적 해결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며 "누증되고 심화되어 온 여러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연구영역을 통화정책의 테두리 안에만 묶어둘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법적 권한이 없는 한은이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데 따르는 비판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러한 권한이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한은이 더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장기적 시각에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이 총재는 건전한 한은 조직문화를 위해 수평적 문화 확산과 임직원의 주인의식에서 비롯된 자발적 참여를 강조했다. 그는 "아래서부터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부서 간 협업과 TF 구성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구현해 나가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며 "최근 경제연구원 보고서에서 기업혁신의 주체로 주목한 '똑똑한 이단아'는 한은에도 필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아울러 한은이 최근 안팎으로 활발한 소통을 펼치는 데 대해 "한은이 '한은사(寺)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도록 하자는 것이 제가 취임 때부터 밝혔던 포부이고, 그 길을 향해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은은 지식의 소비자나 중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각 분야의 프론티어에서 지식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야 하며, 이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논란은 실력으로 이겨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