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면 송상(松商)으로 불리는 개성상인과 만날 수 있다. 송상은 개성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고려·조선 시대의 상인들을 말하며, 이들은 17~18세기 한양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도 활발한 상업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중국 상인들과도 갓, 포목, 홍삼 등 여러 품목을 거래했다.
이들 송상의 핵심 경영 원칙은 '신용제일주의'였다. 세계 최초의 복식부기 기법으로 평가받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은 단순한 회계를 넘어 거래의 투명성과 정확성을 담보하여 '신용을 쌓는 기반'이 되었다. 분개장, 회계장, 장책 등으로 구성된 이 회계 방식은 거래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었고, 이는 장기적인 거래 관계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 원칙은 '의리'다. 송상들은 '장사란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商卽人也)'라는 말을 금언으로 삼았다. 한번 맺은 인연과 그 과정에서 축적된 신용을 목숨처럼 중히 여겼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쌓는 것이 곧 자산의 축적이고 그 자산이 나중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조선 시대로 넘어와 보면, 성리학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아 장사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규범적 덕목들이 중시되었다. 첫째 신용이다. 거래에서 약속 이행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한번 신용을 잃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다. 둘째 정직이다. 상품의 품질을 속이거나 가격을 부당하게 올려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셋째 상생이다. 혼자만 이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 상대방도 함께 이익을 얻어야 한다. 넷째 절제다. 과도한 이익 추구를 경계하고 적정 수준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다섯째 덕망이다. 단순한 경제적 성공을 넘어 사회적으로나 주변에서나 덕망을 쌓는 것은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시대 거상이었던 임상옥(林尙沃)의 "계영배(戒盈杯)"는 그 시대 장사철학을 웅변한다. 그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계영배'라는 술잔은 술 7할이 차면 저절로 비워지는 잔으로서, 과욕을 경계하고 부족함에 만족할 줄 아는 지혜도 담고 있다. 이는 장사에 있어서 10할의 이윤 추구보다는 주변과의 조화, 나눔, 그리고 지속 가능한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이밖에도 벼농사 사회의 상호 협력 전통인 두레와 품앗이는 장사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고 상생하는 정신으로서 상업활동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개별 기업 차원의 이익 극대화 추구보다는 공동체(사회, 이웃, 국가)와의 조화와 균형을 고려하는 세계관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은 큰 울림을 준다.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웃이 없게 하라' 등의 말은 다의적 함의를 갖는다. 흉년에 생존을 위해 투매하듯 저가 매물로 나온 논밭을 사면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화된다. 따라서 최부잣집 일원들은 특히 흉년에 자신들의 쌀독에 비축된 쌀을 이웃들과 함께 나눴다.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 사상가들 또한 부국강병 차원에서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인의 사적 이윤 추구 활동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을 제시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내면 차고, 내버려두면 말라버린다'라고 일갈하며, 경제 순환의 촉진을 통해 사회 전체의 부와 후생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의 장사(상업)는 독특한 가치와 철학을 갖고 있었다. 송상들의 신용 중시, 상생의 철학, 고객과의 장기적 거래관계 유지, 임상옥 계영배의 절제와 나눔, 조화와 지속 가능한 관계, 최부자집의 사려 깊은 나눔, 공동체 정신 등이 그것이다. ESG 정신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기업(회사)'이라는 형태는 서구사회 맥락에 부합하는 내재적 발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외래적 기제를 한국 역사와 맥락에 적절히 버무리고 녹여내는 작업은 간단치 않다. 지난한 과정일 수 있다. 통섭적, 다학적, 다층적,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까닭이다. 심지어는 사회학적, 인문학적 접근도 요청된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국내에서는 이러한 심층적 복합적 고민과 연구가 거의 없었다고 본다. 그저 빨리빨리 기업을 설립해 돈을 버는 것이 절박하고도 우선적 과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을 규율하는 최상위법인 상법 체계에 있어서도 큰 고민 없이 독일의 대륙법적 체계를 수입했던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베꼈다. 여기에 한국적 철학과 세계관이 녹아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97년 IMF 외환위기가 결정적 변곡점이 되었다. 즉 IMF로부터 달러를 빌려오면서 그들이 요구한 영미식의 기제를 아무런 항거조차 못하고 일방적으로 수입해야만 했다. 즉 회사는 곧 주주들이 출자한 자본의 집적물로만 인식하는 영미식 경영철학과 거버넌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에겐 중대한 과제가 놓여 있다. 한국 기업과 경제가 재도약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근본적 과제이다. 이는 천년에 가까운 오랜 우리 역사에 근거한 기업경영의 본령과 거버넌스를 통섭적으로 연구하고 재구축하는 작업이다. 사람과 공동체를 우선했고 돈(이익)은 상위 가치 구현의 부차적 수단으로 인식했던 우리의 맥락에 천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인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처럼 자신의 침대에 맞춰 그것보다 더 큰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자르거나, 작은 사람은 늘려 침대에 맞추는 방식은 곤란하다. 영미식의 주주자본주의라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맞춰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를 늘리거나 자르는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적 연구와 천착이 요구된다. 그 방식으로는 기업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웨이 임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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