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수상한' 창업주 정신의 계승자들

오피니언 데스크 칼럼 남영동에서

'수상한' 창업주 정신의 계승자들

등록 2026.08.19 13:10

차재서

  기자

reporter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저마다 말하는 '창업주 정신'은 과연 같은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한미약품 얘기다. 경영권 분쟁의 상흔을 딛고 재도약하는 듯했던 이 회사는 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딸 임주현 부회장 등 창업주 일가와 개인 최대주주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측 갈등이 고개를 들면서다. 계약 위반 소송으로 재개된 양측의 갈등은 지주회사 지분 매입 경쟁으로 번졌다. 한동안 잊었던 경영권 분쟁의 기시감이 짙어지고 있다.

눈길이 가는 대목은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고(故) 임성기 선대 회장의 뜻이 어김없이 소환된다는 점이다. 가족도 주요 주주도 전·현직 관계자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는 젊은 시절 잠시 회사에 몸담았던 인물까지 등장해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입에 올렸다.

물론 그 자체를 이상한 일로 치부하긴 어렵다. 창업주 정신은 기업의 정체성을 이루는 뿌리이자 오랜 기간 조직을 움직여온 동력이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에서 '임성기'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더욱 특별하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도전해 혁신신약을 만들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을 제약강국으로 이끌겠다는 게 고 임성기 회장의 꿈이었다. R&D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신약개발을 향한 특유의 집념이 오늘날 한미약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갈등의 당사자들이 그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까지 탓할 수는 없다. 그만큼 창업주에 대한 존경이 크다는 의미라고 믿겠다.

그럼에도 위화감을 지울 수 없다. 각자 주장하는 방향이 반드시 같지 않은데도 모두 자신의 판단이 창업주의 뜻과 맞닿아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한둘이 아니다. 임 회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도 주변에서는 저마다 '임 회장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의구심을 키우는 장면이 펼쳐졌다. 김태호 전 큐어세라퓨틱스 대표의 등장이다. 1990년대 한미약품에 입사해 약 3년간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회사를 떠난 지 약 30년 만에 언론 앞에 섰다. 스스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신동국 회장을 알지만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김 전 대표는 회사 내부 사안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역시 '임성기 정신'을 말했다.

진실은 모른다. 그가 제기한 의혹이 사실인지,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진위는 앞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과정에서 창업주까지 소환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한때 한미약품 구성원으로서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창업주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안전한 증인일지 모른다. '임성기 회장이라면 내 선택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해도 정작 당사자는 맞다거나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창업주의 이름이 현재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가장 편리한 명분이 된다면 씁쓸한 일이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창업주의 철학 일부를 떼어내 해석한다면 그 정신은 기업의 유산이 아니라 누군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정작 짚어야 할 것은 현재의 경영전략과 성과인데, 어느 순간 싸움은 '누가 창업주의 뜻을 더 잘 아느냐'는 정통성 논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창업주 정신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가족이라고 독점할 수 없고, 오랜 지인이라고 대신 말할 수도 없다. 하물며 현재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가 돼서는 더더욱 안 된다.

덧붙여 그가 등장한 시점에도 궁금증은 남는다. 한미약품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왜 회사 문제에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지다. 스스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고 밝힌 것만으로 이런 물음까지 모두 해소되진 않는다.

임성기 회장이 실제로 남긴 것은 몇 마디의 말이 아니라 한미약품이라는 기업이다. R&D를 중시했다면 연구개발로, 글로벌 제약사를 꿈꿨다면 신약 성과로, 회사의 성장을 바랐다면 기업가치로 보여주면 된다. 창업주의 이름을 빌리는 것보다 자신의 성과로 그 정신을 증명하는 편이 진짜 계승자의 모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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