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재생에너지 확산에 초고압 케이블 수요 증가XLPE·반도전·자켓 패키지로 고부가 시장 공략기술 검증 넘어 장기 공급·매출 확대가 관건
한화솔루션이 석유화학 업황 부진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초고압 전선소재의 제품군을 확대하며 고부가 사업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범용 석유화학 제품보다 기술 진입장벽이 높은 초고압 케이블 소재를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최근 500킬로볼트(kV)급 초고압 교류송전(HVAC) 케이블 소재의 형식시험을 통과하면서 기술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다만 기술 검증이 곧바로 대규모 공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만큼 고객 승인과 실제 수주를 통해 판매 기반을 얼마나 넓힐 수 있을지가 사업 확대의 관건으로 꼽힌다.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화솔루션 와이어앤케이블(W&C) 부문은 중국 초고압 케이블 제조사 칭다오 한허와 터비엔전공(TBEA)이 각각 제작한 500kV급 HVAC 케이블에 자사의 가교폴리에틸렌(XLPE) 절연·반도전 소재를 적용해 형식시험을 통과했다. 기존 400kV급에 이어 500kV급까지 적용 범위를 넓히며 초고압 전선소재 시장에서 기술 경쟁력을 강화했다.
한화솔루션이 초고압 전선소재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글로벌 전력망 투자 확대가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증가하고 재생에너지 발전원이 확대되면서 발전지역에서 전력 수요처까지 전기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송전망 확충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전압이 높고 송전 거리가 긴 전력망에 적용되는 초고압 케이블과 관련 소재의 수요도 함께 늘어나는 추세다.
원자재 시장조사업체 CRU에 따르면 245kV 초과 초고압 케이블 수요는 도체 중량 기준 2025년 22만2000톤에서 2030년 41만2000톤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13.1%에 달한다. 같은 기간 해저케이블과 초고압 직류송전(HVDC) 케이블 시장도 각각 연평균 16.3%, 15.1%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력망 투자 확대가 초고압·해저·직류송전 관련 소재 시장의 성장 기회로 이어지는 셈이다.
다만 시장 성장만으로 공급 확대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초고압 케이블은 전압이 높아질수록 절연·반도전 소재에 요구되는 성능과 장기 신뢰성 기준이 까다로워진다. 소재 내부의 미세한 이물질이나 품질 편차도 장기간 운전 과정에서 절연 성능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높은 청정도와 일관된 품질 관리가 필수적이다. 제품 개발 역량뿐 아니라 안정적인 생산과 품질 관리 체계까지 갖춰야 하는 만큼 범용 석유화학 제품과는 시장 진입 방식이 다르다.
소재 개발 이후 실제 공급까지 거쳐야 할 검증 절차도 많다. 케이블 제조사의 소재 평가와 시제품 생산을 시작으로 제3자 시험·인증을 받아야 하며, 이후 전력청이나 송·배전망 운영자 등 최종 수요자의 승인도 필요하다. 제품과 고객의 요구에 따라 장기간 전압과 열을 가해 신뢰성을 확인하는 사전적격시험(PQ Test)이 추가되기도 한다. 기술력을 확보하더라도 고객 검증과 공급 실적을 쌓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구조다.
이번 500kV급 소재의 형식시험 통과 역시 상용화 과정의 중요한 단계지만 최종적인 사업 성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식시험은 케이블 설계와 소재가 요구 성능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향후 추가적인 고객 검증과 승인, 실제 프로젝트 참여와 수주를 거쳐야 안정적인 공급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한화솔루션으로서는 높아진 기술 수준을 고객사의 채택과 반복적인 판매로 연결하는 것이 다음 과제다.
회사는 절연재뿐 아니라 반도전재와 외피 소재까지 아우르는 제품 구성을 앞세워 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다. XLPE 절연재와 함께 케이블 내부·외부 반도전재, 외피에 쓰이는 자켓까지 공급하는 소재 패키지를 통해 제품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개별 소재 공급을 넘어 케이블 제조사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제품군을 갖춰 고객 접점을 넓히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일부 고부가 제품에서는 판매 확대도 가시화하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올해 글로벌 초고압(SEHV)급 XLPE 판매량이 전년보다 두 배 가까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시장에서도 325kV급 등을 포함한 초고압 소재의 연간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약 세 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기술 개발과 고객 검증이 일부 제품군에서 판매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초고압 교류 케이블에 국한하지 않고 해저·직류송전 분야로 인증 범위를 넓히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지난 15일 공개한 W&C 사업 자료에 따르면 320kV급 HVDC용 XLPE·반도전 소재는 PQ시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420kV급 해저케이블 소재는 형식시험 단계에 있다. 500kV급 지중케이블 소재는 PQ시험을, 535kV급 HVDC 소재는 형식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전압과 용도별로 검증 이력을 축적해 적용 가능한 시장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해외 고객 대응 체계도 강화하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한화 케이블 솔루션스' 법인을 설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에 기술 인력을 배치했다. 핀란드·스웨덴·네덜란드 등에는 물류 거점을 두고 현지 고객의 소재 적용과 품질 문제에 대응하는 한편 납기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기술 검증뿐 아니라 고객과의 기술 협의, 품질 대응, 물류까지 아우르는 현지 지원 체계를 구축해 해외 시장 공략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이다.
한화솔루션은 이 같은 기술 개발과 제품군 확대, 해외 고객 대응을 바탕으로 고부가 제품의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일 계획이다. 2031년까지 전체 전선소재 제품 구성에서 고부가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을 2025년 대비 최소 네 배 이상 확대한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초고압 교류 케이블에서 확보한 기술 경쟁력을 해저·HVDC 소재와 유럽 등 해외 시장으로 확장해 중장기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관건은 시장 성장과 기술 경쟁력을 실제 수익성 개선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초고압 전선소재는 고객 승인과 장기 신뢰성 검증이 필요한 만큼 단기간에 공급 규모를 키우기 어렵다. 500kV급 형식시험 통과와 판매 증가 전망이 의미 있는 진전인 것은 분명하지만, 고부가 제품의 매출 기여도와 수익성 개선 효과가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사업 전환의 성과도 입증할 수 있다.
한화솔루션 관계자는 "AI와 전기화, 재생에너지 확대로 초고압·해저·HVDC 케이블 시장에서 장기적인 성장 기회가 커지고 있다"며 "축적한 소재 기술과 고객 인증 경험, 글로벌 기술 지원 체계를 바탕으로 고부가 전선소재의 고객 검증을 실제 판매 성과로 연결해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웨이 이건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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