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성능을 담은 전기차 허머 EV주행 보조 시스템 슈퍼 크루즈 지원최신 기술 혁신과 전통 디자인의 결합
살다 보면 우리나라 도로 위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자동차들이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나 해외 자동차 잡지에서나 보던 차, 우리나라 도로 사정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들이 대표적이죠. GMC 허머 EV도 그런 존재였습니다. 미국의 넓은 땅과 곧게 뻗은 도로, 커다란 픽업트럭과 SUV가 익숙한 풍경 속에서나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 차가 정식으로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한국GM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림의 떡인 줄 알았던 자동차가 어느 날 진짜 떡처럼 눈앞에 나타났으니까요. 물론 한입에 먹기에는 너무 크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요.
허머라는 이름을 들으면 군용 험비부터 떠올리는 분이 많으실 겁니다. 각진 차체와 네모난 창문, 단단한 철판을 두른 듯한 인상은 자동차라기보다 바퀴를 단 장갑차에 가깝습니다. 허머 EV는 그 유전자를 전기차 시대에 맞춰 다시 풀어낸 모델입니다. 기름 냄새 대신 전기를 먹고 달리지만, 몸집과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요즘 전기차들이 공기저항을 줄이겠다며 매끈한 물방울을 닮아가는 동안 허머 EV는 굳이 바람을 피해 달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불게 두고, 길이 좁으면 좁은 대로 자기 존재를 알리는 쪽입니다. 도로 위에서 만나는 자동차라기보다 도로의 풍경을 바꾸는 자동차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덩치만 믿고 밀어붙이는 무식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시승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간선도로의 굽은 구간을 돌아 나가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차체가 높으니 코너에서 좌우로 크게 기우뚱할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 움직임은 생각보다 차분했습니다. 차체 폭이 넓은 덕분인지 롤이 예상만큼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뒷바퀴를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틀어주는 후륜 조향도 한몫합니다. 거대한 몸집이 코너 안쪽으로 영민하게 파고드는 모습은 꽤 인상적입니다. 몸은 레슬링 선수인데 발놀림은 의외로 날렵한 댄서랄까요. 물론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마법은 아닙니다. 차체가 큰 만큼 움직임의 관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운전자가 예상하는 움직임보다 훨씬 수월하게 방향을 바꾼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전기차라고 하면 전기모터의 조용한 소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허머 EV는 귀까지 심심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가상 엔진음이 들어가는데요. 이 소리, 제법 괜찮습니다. 낮고 묵직하게 그르렁거리는 음색이 마치 커다란 V8 엔진을 깨운 듯합니다. 인위적인 소리를 억지로 덧씌웠다는 느낌도 크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가속할 때 소리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니 매끄러운 움직임과도 잘 어울립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전기차의 가상 사운드 가운데 가장 세련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옛날 자동차의 흉내를 낼 필요가 있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영화에 배경음악이 꼭 필요한 맥락과 비슷합니다. 허머 EV의 가상 엔진음은 적어도 제게는 그런 역할로 느껴지더군요.
고속도로에서는 슈퍼 크루즈가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운전자가 합법적으로 스티어링휠에서 손을 떼도 되는 주행 보조 시스템인데요. 작동 조건이 맞는 도로(주로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 시스템을 활성화하면 운전자 제어 없이 차가 차로를 따라 달립니다. 장거리 운전에서 편리하다는 말은 더 보탤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만 슈퍼 크루즈에도 분명한 조건이 있습니다. 지도 정보가 확보된 도로가 아니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익숙한 고속도로에서는 든든한 조수를 얻은 기분이지만, 지원되지 않는 구간에 들어서면 다시 운전자의 몫입니다. 편리한 기능일수록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운전대를 맡겼다고 해서 운전자의 책임까지 차에 넘길 수는 없으니까요.
실내는 외관의 인상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곡선을 잔뜩 넣어 미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보다는 직선을 중심으로 단정하게 정리했습니다. 군용 험비를 연상시키는 투박한 분위기를 남기면서도 계기판과 중앙 디스플레이는 깔끔합니다. 화면이 크다는 사실을 과시하기보다 필요한 정보를 알아보기 쉽게 배치한 쪽입니다. 에어컨과 비상등처럼 자주 쓰는 기능을 물리 버튼으로 남겨둔 점도 반갑습니다. 화면 속 메뉴를 몇 단계씩 찾아 들어가기보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편이 빠를 때가 많습니다. 자동차를 타면서까지 스마트폰처럼 모든 기능을 화면에 넣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주행 중에는 손끝으로 위치를 익힌 버튼 하나가 화려한 그래픽보다 유용합니다.
에어컨 송풍구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타본 차 가운데 손꼽힐 정도로 큽니다. 실내 곳곳의 요소가 하나같이 넉넉한데요. 허머 EV에 앉아 있으면 작은 물건까지 크게 만드는 미국식 취향을 실감하게 됩니다. 시동 버튼이 없다는 점은 조금 낯설었습니다. 차에 타면 주행할 준비가 된 상태로 이어지는 방식은 곧바로 출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차를 잠깐 세웠다가 다시 움직이거나, 짐을 싣고 내리느라 차를 들락날락할 때는 익숙한 시동 버튼이 그리워집니다. 편리함을 위해 익숙함을 덜어냈는데,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허머 EV의 또 다른 매력은 지붕입니다. 탈착식 패널을 분리하면 하늘을 차 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분리 과정이 어렵지 않고 다시 조립하기도 비교적 간편해 자주 쓰게 되더군요. 지붕을 떼어낸다는 말만 들으면 정비소에 맡겨야 할 대공사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부담이 적습니다. 탈착한 패널을 보관할 공간도 마련돼 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하늘을 지붕 삼아 달리고, 비가 오면 간단하게 닫으면 됩니다. 자동차를 타는 일이 단순히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기능이 일깨워줍니다. 가끔은 목적지보다 그곳으로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니까요.
전비는 1kWh당 3.9~4km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차체 크기와 무게를 생각하면 효율이 나쁘지 않죠. 하지만 무려 205kWh에 달하는 대용량 배터리를 품고 있습니다.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만큼 저장하는 양도 압도적인 덕분에 거대한 차체와 강력한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넉넉한 주행거리를 확보했습니다. 허머 EV에서 효율은 숫자 자체보다 압도적인 크기와 성능을 얼마나 오래 뒷받침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허머 EV는 누구에게나 합리적인 자동차는 아닙니다. 좁은 주차장과 복잡한 도심에서는 거대한 몸집이 부담이 될 수 있고, 일부 기능은 익숙한 자동차의 문법과 다릅니다. 하지만 이 차의 가치는 모든 상황에서 가장 편리하고 효율적인 자동차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관, 예상보다 민첩한 움직임, 자연스러운 가상 엔진음, 지붕을 열고 달리는 즐거움까지. 전기차가 자동차의 미래라면 허머 EV는 그 미래가 반드시 매끈하고 얌전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자동차를 고를 때 우리는 흔히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멀리 가는지, 얼마나 적게 쓰는지를 따집니다. 물론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자동차에는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매력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갖고 싶은 물건이듯, 자동차 역시 이동 수단인 동시에 취향을 드러내는 물건입니다. 허머 EV는 그런 점에서 꽤 솔직합니다. 작아지거나 얌전해질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기차라는 새로운 심장을 달고도 자기답게 남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림의 떡인 줄 알았던 차가 한국 도로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고 나니, 이제는 한 가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해외의 그림 속 자동차가 우리 앞에 나타날까요(제발 콜벳!). 한국GM의 다음 선택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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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권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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