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전 공개된 ‘민우씨 오는 날’은 분단국가의 아픔을 통해 한 여인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한국적인 정서의 한으로 표현한 영상미가 돋보였다. 북촌 한옥 마을의 전경 속에서 펼쳐지는 고즈넉함은 영화 전체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선보이는 듯 아늑한 분위기다. 이곳에 살고 있는 ‘연희’(문채원)는 어느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는 여인이다.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시장을 보고, 꽃다발을 사고 식탁을 차린다. 거울을 보면서 잠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이상한 점 하나가 있다. 목에 걸고 다니는 수첩은 그의 기억을 대신하고 있다. 그는 조금씩 사라져 가는 자신의 기억을 대신하는 수첩에 하루의 일과를 소중히 써내려 가며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딸은 가끔씩 전화로 엄마에게 안부를 전한다. 평생 동안 한옥집을 떠나지 못하고 홀로 지내고 있는 엄마를 딸은 ‘연희씨’라고 부른다. 딸은 엄마에게 ‘엄마처럼 살기 싫어 독신을 고집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그렇다 엄마, 연희씨는 기억을 잡아 먹히는 치매를 앓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이제 겨우 20대 후반 정도에 불과한 연희씨가 치매라니. 또 그가 받고 있는 전화기 너머 딸의 목소리가 이미 장성한 여성의 목소리라니. 화면 속 연희의 모습은 무언가 이상하다.
연희는 자꾸만 자신의 추억을 잡아먹는 기억의 괴물 속에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는 백발에 주름진 여성(손숙)과 한 젊은 여성의 웃고 있는 사진이 몇 차례 비춰진다. 노년의 연희와 미국에 살고 있는 그의 딸이다.
영화 ‘민우씨 오는 날’ 속에는 두 명의 연희가 등장한다. 추억 속 아련한 기억을 품고 있는 젊은 시절의 연희(문채원)와 현재를 살아가는 기억을 붙잡고 싶은 연희(손숙)다. 연희는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영화 속 제목의 그 남자인 민우씨(고수)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해 두 사람은 이별을 했다. 연희는 평생을 남편을 기다려왔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민우씨는 연희에게 꿈이자 현실이며 기다림이고 기억이며 추억이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연희는 남편이 좋아하는 숭어국을 매일 같이 끓이고 기다린다. 이따금 환청 속에서 자신을 찾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지만 연희는 기억이자 추억인 남편을 놓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현실로 돌아온 화면은 늙고 추레해진 연희가 이산가족 상봉단에 뽑혀 평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 모습을 비춰준다. 연희는 평생을 기다려 온 남편 민우씨를 만날 수 있을까. 딸은 전화로 말한다. 평생 동안 처음 불러본다며 “엄마”라고 부른다. 제발 그 순간만큼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아 달라고. 수첩에 하고 싶은 말 모두 적어서 민우씨에게 전하라.
‘민우씨 오는 날’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현실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산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리하고 머물러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감성의 실체인 사랑을 말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기다리고 쫓으며 함께 하고 싶어 했던 ‘민우씨’가 ‘오는 날’을 평생 동안 기다려 온 한 여자는 그렇게 화면 속 고즈넉한 한옥 마을 한복판에서 과거로 돌아간 채 남편과 함께 행복한 만남을 이뤄낸다.
강제규 감독은 단 28분이란 압축된 시간 속에서 감성의 결을 어디까지 나눌 수 있는지를 선보이며 블록버스터의 거장다운 유려한 연출력으로 ‘민우씨 오는 날’의 풍부한 로맨스를 그려냈다. 특히 그가 만들어 낸 로맨스 월드 속에서 살아 숨쉬는 문채원과 손숙의 연기는 텍스트로 표현되기 힘들 정도의 울림을 전한다. 이 짧은 영화 속에 단 몇 컷 등장하는 고수의 로맨틱함이 두 신구 여배우의 울림을 전하는 매개체란 점에서 영화는 정점에 도달한다.
아주 짧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강제규 감독과 인연이 있는 유명 배우들의 카메오 출연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민우씨 오는 날’의 진짜 감정은 분명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각각의 장면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만큼 ‘민우씨 오는 날’은 단 한 장면도 흘려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이와 울림의 조화가 완벽해 보인다. 이 모든 게 28분의 시간 안에 담겼다는 게 경이로울 정도다. 개봉은 오는 18일.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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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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