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고려시대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적 묘사는 모호하다. 무신정권 시대, 혼탁한 세상을 구하자고 ‘도원결의’를 떠올리는 세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 정권을 심판하려 든다. 풍천(배수빈), 설랑(전도연), 덕기(이병헌) 이들 세 사람은 ‘풍진삼협’이라 불리며 파죽지세로 민란을 주도한다. 정권의 수장 이의명(문성근) 장군의 아들 존복(김태우)을 사로잡은 이들은 민심의 준엄함을 들이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막내 덕기가 배신을 한다. 욕심이다. 평생 ‘의’를 위해 ‘협’을 쫓았던 ‘풍진삼협’이 깨지는 순간이다. 풍천은 죽는다. 덕기는 설랑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설랑은 그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덕기의 욕심이 문제였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일까. ‘공수레공수거’란 말도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다. 덕기는 존복을 통해 우연히 자신의 심연 속 욕망이 터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왜 나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인가.”
덕기는 욕심대로 힘을 손에 쥐게 된다. 이름도 ‘유백’이 됐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눈에 잊고 지낸 기억이 나타난다. 자신의 사병을 모집하는 무술경연장에서다. 느닷없이 나타난 복면의 한 사내는 경쟁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린다. 그의 몸짓이 눈에 익다. 설랑이다. 과거설랑은 유백에게 “너와는 나는 풍천의 딸 홍이에게 죽을 것이다”는 경고를 했다. 저 사내는 홍이다. 사라진 설랑의 그림자다. 유백은 무언가에 쫓기듯 그를 따라나선다.
영화의 제목인 ‘칼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칼은 권력이고 힘이고 폭력이다. 폭력이 곧 정의가 되고 힘이었던 시절, 세 사람은 불의가 아닌 정의를 위해 싸웠다. 칼은 이들에게 폭력이 아닌 ‘협’ 그 자체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도 아닌 칼로서 그것을 분별했다. 칼은 그런 시대에 결국 ‘의’의 진심을 결정짓는 ‘협’의 도구였다. 그렇게 ‘풍진삼협’의 칼은 유백과 설랑(월소) 그리고 홍이(김고은) 세 개의 칼로 다시 이어진다.
‘협녀’ 속 등장하는 세 자루의 칼은 그런 의미다. ‘의’를 꿈꾸며 ‘협’의 수단으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한 결과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끝의 마침표는 세 갈래 길로 찢어지고 만다. 하나의 칼(덕기-유백)은 욕심, 또 하나의 칼(설랑-월소)은 증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칼은 복수(홍이)다. 욕심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갈림길 중심에 사랑이란 예상 밖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자루의 칼 가운데 흐름의 중심은 바로 설랑-월소의 검이다. ‘풍진삼협’의 설랑은 덕기의 배신 뒤 눈이 먼 뒤 월소란 이름으로 숨어 지내며 홍이를 키워 복수를 꿈꾼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흐름이 이어질수록 유백과 월소의 거리를 점차 끌어당긴다. 기다란 줄로 이어져 있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점차 다가선다. 한 남자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한 여자는 지독히도 지켜내려고 했던 ‘의’와 ‘협’의 길이 무너진 것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두 사람의 검은 강렬한 파열음을 내면서 부딪쳐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파열음의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예상 밖의 감정이 드러나면서 ‘협녀’는 ‘무협’의 외피 속에 담겨 있던 진짜 얘기에 관객들의 오감을 집중시킨다.
홍이가 왜 월소의 손에 길러진 채 부모의 복수를 꿈꾸고 유백에게 칼을 들이 밀었는지, 왜 월소는 눈이 먼 채 홍이를 기르며 유백의 심장을 노렸는지, 유백은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설랑(월소)의 그림자에 왜 그토록 기묘한 감정의 굴곡을 드러냈는지. 이 모든 해답은 영화 마지막 세 자루의 검이 부딪치는 ‘칼의 대화’ 속에서 끔찍스런 진실을 드러내면서 세 사람의 가슴을 찢어 놓는다. 욕심과 증오 그리고 복수의 한 가운데 자리했던 죽음보다도 잔인한 사랑의 감정은 ‘협녀, 칼의 기억’이란 제목 속 ‘기억’을 잡은 채 길고 긴 여운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때리고 흐느끼게 할 것이다.
덕기-유백을 연기한 이병헌은 표정 하나로 눈빛 하나로 캐릭터 자체가 되는 신기의 내공을 펼친다. 고려 최강의 초절정 무술 고수인 ‘덕기-유백’은 곧 이병헌 자신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력하고 또 화려하며 멋스럽다. 초고속 카메라인 ‘팬텀’으로 촬영된 영화 속 유백의 무술 장면은 ‘와호장룡’을 무색케 할 비주얼로 재탄생됐다. 설랑-월소를 연기한 전도연 역시 강력한 아우라를 발휘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 검객’을 연기하기 위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그의 체감은 스크린을 통해 고스란히 튀어나올 정도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준 처연한 전도연의 눈빛은 ‘협녀, 칼의 기억’ 속 화룡점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기억에 각인될 소리없는 비가(悲歌) 그 자체다. 두 사람의 어울림에 비해 김고은의 폭발성은 강렬하고 날카롭다. 그가 왜 충무로 20대 여배우로서 꼭지점에 서 있는지는 ‘협녀, 칼의 기억’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여러 악재와 루머가 나돌았다. 한때 개봉 자체가 불투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협녀, 칼의 기억’은 기대 이상을 넘어선 그 이상이다. 무협이란 외피로 설명하기 힘든 잔인한 사랑의 파열음이 귓가를 아직도 울린다. 이토록 잔인하고 슬프고 묵직하며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낼 멜로의 힘이 또 있었던가. 개봉은 오는 13일.
김재범 기자 cine517@
뉴스웨이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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