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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류승완, 그가 바꾼 가치의 변화가 고마운 이유

[1000만 베테랑] 영화감독 류승완, 그가 바꾼 가치의 변화가 고마운 이유

등록 2015.08.31 16:09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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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DB뉴스웨이 DB

1000만이란 숫자의 의미는 다양하다. 국내 흥행 시장에선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1000만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의 영역에 무려 16편이 이름을 올렸다. 어떤 감독은 두 편이나 이 신의 영역에 자신의 발자취를 새겨 넣었다. 배우 오달수는 무려 7편이다. 그를 ‘1000만 요정’으로 부르는 이유다. 1000만 이란 숫자는 이제 흥행 영화의 지표가 됐다. 누구나 흥행을 꿈꾸지만 누구나 다가설 수 있는 숫자도 아니다. 그렇기에 1000만은 가깝고도 먼 이름이다.

최근 영화 ‘베테랑’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올해 개봉 영화 가운데 최장기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며 1000만에 성공했다. 1000만이 넘은 시점에서도 흥행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내심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 상위권을 노려봄직한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의 중심에는 영화감독 류승완의 특별함이 있다. 비주류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류 감독의 1000만 흥행 타이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남다르고 특별하다.

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

◆ 학벌을 이겨낸 류승완의 목표

영화배우 류승범과 함께 류승완 감독은 국내 영화계에 보기 드문 형제 영화인이다. 알려진 대로 동생 류승범을 데뷔시킨 장본인이 바로 류승완이다. 류승완의 영화 인생은 13세 전후로 시작된다. 뉴스웨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성룡의 영화를 보고 꿈을 꿨던 것 같다”면서 “성룡 영화가 주는 생짜의 느낌,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쾌감의 끝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전한 바 있다.

1973년생인 류 감독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거장 임권택 감독도 고교 중퇴자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고교 중퇴 이후 51년만에 졸업장을 받기는 했다. 유독 국내 영화계에선 학벌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하다. 해외 유학파, 혹은 명문대학 출신의 감독이 즐비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졸자인 류승완 감독의 성공은 요원한 목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박찬욱, 곽경택, 박기영, 장선우 감독의 밑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꾸준히 시나리오도 썼다. 돈이 조금 모이면 독립영화 단편 영화를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세상의 빛을 본 영화가 희대의 데뷔작으로 통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충무로의 영화인들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온갖 찬사를 쏟아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충무로 극장 단관 개봉으로선 이례적으로 폭발한 입소문은 류승완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다. 두터운 카르텔의 벽으로 둘러싸인 영화계의 눈높이에서 봤을 때 ‘고졸 풋내기’의 영화는 어쩌다 얻어걸린 데뷔작일 뿐이었다. 이후 ‘다찌마와 리’로 류승완은 다시 한 번 온라인을 강타했다. 그 당시로선 생소한 온라인 영화, 그리고 100만을 넘긴 상상 초월의 조회수는 류승완의 능력이 ‘얻어 걸린’ 행운이 아님을 증명시켰다.

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

◆ 충무로 액션 키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마와 리’ 이후 류승완은 충무로 ‘액션 키드’란 별칭을 얻게 됐다. 그는 힘을 얻고 본격적인 상업영화 데뷔작 ‘피도 눈물도 없이’(2002)를 내놨다. 지금으로서도 충무로에선 금기시되고 있는 여성 투톱 액션 무비다. 이후 ‘아라한 장풍대작전’(2006), ‘짝패’(2006)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냈다. 날것 특유의 생동감과 몸의 연기가 펼치는 활력은 국내 주류 영화감독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기 힘든 역동성을 담고 있었다. 특히 2005년 내놓은 ‘주먹이 운다’는 당대 최고의 배우 최민식과 자신의 페르소나를 넘어 분신인 동생 류승범을 투톱으로 내세웠다. 일본과 국내의 실화 속 주인공의 사연을 모티브로 따온 이 얘기는 자세히 보면 자신과 동생 류승범의 자전적 얘기를 담은 듯 했다. 액션이란 장르 속 특화된 연출력과 취향의 스타일이 갇혀 있을 것이란 편견이 이 영화 한 편으로 무너졌다. 진득하고 끈끈하고 강렬하고 또 눈물이 뒤섞인 삶의 편린이 묻어 있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2008년 선보인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류승완의 B급 감성이 집대성된 작품이었다. 그의 초기작 ‘다찌마와 리’의 극장판 확장본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류 감독과 그의 아내 강혜정 대표가 일하는 제작사 ‘외유내강’을 바닥까지 끌어 내린 비운의 작품이다. ‘류승완은 한계가 있다’ ‘류승완의 영화는 취향의 문제다’ ‘B급과 키치적 취향의 한계성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쏟아지기도 했다.

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영화 '베테랑' 촬영 현장

◆ 흥행 감독 도전, 그리고···

류승완 감독이 영화 인생 최초 남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든 작품이 있다. 2010년 선보인 ‘부당거래’다. 누적 관객 수 272만을 기록한 이 영화는 류승완의 진화에 분명한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권력과 비리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밀도 높은 시각으로 조명했다. 그동안 액션이란 장르에 특화된 그는 원경을 바라보는 시각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부당거래’는 반대로 초근접 근경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인물과 인물의 감정 액션은 그 어떤 액션 장르의 쾌감보다도 높았다. 캐릭터들의 ‘눈싸움’ ‘기싸움’은 보는 이들에게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안겨줄 정도로 날 것의 펄떡임을 전했다.

‘부당거대’ 이전까지 류승완은 인물에게만 집중했다. 하지만 ‘부당거래’에선 인물과 함께 그 주변의 보이지 않은 공기의 움직임까지 세밀한 계산으로 짚어냈다. 그는 당시 뉴스웨이와의 인터뷰에서 “살면서 변화된 내 환경의 영향이 연출의 스타일에도 약간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인정했다. 단순히 흥행에 대한 욕심과 목마름이 아니었다. 스타일의 진화였고, 시각의 확장이었다.

2012년 선보인 ‘베를린’은 100억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었다. 스파이 액션이란 희대의 장르로 류승완은 돌아왔다. 사실 류 감독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영화 자체가 규모의 산업이라고 규정될 때, ‘베를린’은 류 감독에게 새로운 흥밋거리를 줬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영화감독이란 직업적 의식과 영화감독으로서 느끼는 작품에 대한 부담감이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그는 ‘베테랑’ 개봉 전 뉴스웨이와의 인터뷰에서 “너무도 스트레스가 심했다”면서 “내가 즐기고 또 내가 잘하는 영화를 꼭 다시 즐겁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베테랑’을 기획하게 된 이유를 전했다.

이후 ‘베테랑’이 개봉했다. 통쾌했다. 통렬했다. 시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했다. 또 응원했다. 박수를 쳤다. 류승완은 관객 모두를 ‘베테랑’ 속 서도철(황정민) 형사로 만들었다. 관객들은 나쁜 놈 조태오(유아인)의 손목에 수갑을 철커덕 채우며 시원한 한 판의 끝을 냈다. 류승완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할 일을 약속대로 끝마쳤다”면서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는 말로 1000만 관객 모두를 ‘베테랑’으로 대했다.

1996년 단편 ‘변질헤드’로 영화감독이란 타이틀을 자신의 인생에 더했다. 그리고 햇수로 딱 20년이 흘렸다. 그는 1000만 감독으로 불린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과 목표 그리고 시선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변한 것이라면 이제 그는 ‘액션 키드’가 아닌 ‘액션 마에스트로’가 됐단 것 뿐이다.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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