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서 요직 두루 거친 6선 국회의원 출신兄 연암 도와 금성사 경영 기반 닦는 역할해정계 떠난 뒤 경영에 전념···‘무욕경영’ 강조
1923년 6월 24일 경남 진주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 춘강 구재서 공의 여섯 아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진주공립중학교와 일본 후쿠오카고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1950년 락희화학(현 LG화학) 전무로 입사해 기업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고인의 인생 역정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은 정치인 생활이었다. 그는 1958년 고향 진주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고 이후에는 친형인 연암을 도와 금성사(현 LG전자) 부사장으로서 경영에 참여했다.
고인은 금성사 부사장 재직 당시 금성사가 오늘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인은 1963년 다시 정계로 돌아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7대와 8대 국회의원에도 연이어 당선됐다.
유신헌법 공포 이후 치러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당선됐고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시 고향 진주에서 출마해 당선돼 6선을 달성했다.
고인은 국회의원 재직 중 민주공화당에서 원내부총무 겸 대변인,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의장 등 당내 요직을 두루 거쳤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는 등 정치인으로서 굵직한 경력을 쌓았다. 1973년부터 2년간은 무임소장관으로도 일하며 각료 경험도 축적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뒤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 정치 규제를 당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인생을 사실상 접게 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고인에 대한 정치 규제를 해제했지만 고인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않고 경영에만 전념했다.
고인은 지난 1982년 조카인 구자경 당시 회장(현 LG그룹 명예회장)이 이끌던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의 창업고문으로 위촉됐고 1998년에는 LG화학의 창업고문으로 선임돼 경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3년 LG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자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등 당시 생존 중이던 창업 1세대 회장들은 LG전선(현 LS전선), LG산전(현 LS산전), LG니꼬동제련(현 LS니꼬동제련), LG칼텍스가스(현 E1) 등을 LG그룹에서 떼어내 LG전선그룹을 출범시켰다.
당시 고인은 LG전선그룹 명예회장으로 선임돼 장남 구자홍 LS니꼬동제련 회장 등과 함께 경영에 나섰다. LG전선그룹은 지난 2005년 현재의 LS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인을 비롯한 LG 창업 1세대 회장들은 LS그룹을 세우면서 후대에도 ‘사촌 경영’을 이어가자는 뜻을 표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재계 여러 기업에서 직계 또는 사촌 형제 간 유산·경영권 승계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LS그룹만큼은 형제의 우애로 불화 없이 경영에 나서고 있어 재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
실제로 LS그룹은 구자홍 회장, 구자엽 LS전선 회장, 구자철 예스코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구자용 E1 회장, 구자균 LS산전 회장, 구자은 LS엠트론 부회장 등 사촌 형제가 지금도 매주 첫 번째 금요일에 모여 경영 현안을 논의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고인은 평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무욕론(無慾論)’을 가족과 임직원들에게 당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욕심이 과해지면 가족의 우애가 깨지고 회사의 경영도 혼란스러워진다는 점을 강조한 고인의 지론이었다. ‘인화’를 강조하는 LG가의 가풍도 이와 연관이 있다.
고인은 오랫동안 정치인과 경영인 등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인생을 살면서도 소박한 삶을 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LS그룹 측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7일 오후부터 시작될 고인에 대한 조문도 최대한 간소하게 진행하며 조화 등도 일체 받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정백현 기자 andrew.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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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웨이 정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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