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약관에 즉시연금 연금 지급 시 만기보험금 지급 재원을 공제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과소 지급한 보험금을 지급하라.”(2017년~)
금융당국이 문제가 없다며 허가한 보험약관을 스스로 문제 삼아 뒤늦게 보험금 지급을 압박하는 ‘뒷북감독’이 반복되고 있다.
보험상품을 판매할 때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보험금 지급이 논란이 되자 여론에 떠밀려 보험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행태는 일명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 때와 판박이다.
최대 1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생명보험사들의 즉시연금 미지급액 지급 논란을 놓고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다.
1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이달 26일 이사회를 열어 즉시연금 미지급액 일괄 지급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는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1월 삼성생명 즉시연금 가입자 A씨에게 과소 지급한 연금을 지급토록 한 금융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의 결정에 따라 모든 가입자에게 미지급액을 일괄 지급할 것을 요구한데 따른 것이다.
삼성생명은 지난 2012년 9월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에 가입한 A씨에게 만기보험금 지급 재원을 공제한 연금을 지급했으나, 상품의 약관에는 연금 지급 시 해당 재원을 공제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삼성생명의 즉시연금 과소 지급 사례는 약 5만5000건이며 미지급액은 약 4300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생명을 포함한 전체 생보사의 즉시연금 미지급액은 최소 8000억원, 최대 1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한화생명과 교보생명 등 다른 대형 생보사들은 업계 1위사 삼성생명 이사회의 결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화생명의 경우 올해 6월 즉시연금 가입자 B씨에게 과소 지급한 연금을 지급하라는 분조위의 결정에 대한 의견서 제출 기한을 오는 8월 10일까지 한 차례 연장한 상태다.
교보생명은 분쟁조정 신청 사례는 없었지만 금감원의 일괄 구제 방침에 따라 삼성생명과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이사회에서 대책을 논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금감원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보험사들이 약관에 없는 내용을 근거로 보험금을 덜 지급했다는 점이다. 약관에 내용이 있음에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은 2016년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 때와 닮은 듯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즉시연금과 자살보험금 모두 약관이 논란의 발단이 됐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문제의 약관은 금감원의 검토와 허가를 거쳤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금감원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약관에 따라 판매한 상품을 뒤늦게 금감원 스스로 문제 삼고 있는 셈이다. 약관이 잘못 됐거나 허점이 있었다면 사전에 잘못 된 내용을 바로 잡거나 문구를 명확히 하도록 했어야 한다.
소비자의 민원이 제기되고 논란이 불거진 이후에야 여론에 떠밀려 금융사를 압박하는 관행은 매번 반복되고 있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목 하에 금융감독기관의 위상을 재확인하려는 구태도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금감원은 지난 2016년 주계약 또는 특약을 통해 피보험자가 자살한 경우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상품을 판매했으나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생보사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토록 했다.
금감원은 당시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후 피보험자가 자살한 경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약관을 근거로 들었다. 이에 대해 보험사들은 약관상의 실수일 뿐 자살은 재해가 아닌 만큼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맞섰다.
특히 대법원은 보험금 청구권 소멸시효인 2년이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금감원은 소멸시효와 관계없이 보험금을 전액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상위 3개사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보험금 지급 불가 입장을 고수하다 금감원의 고강도 제재 방침에 전액 지급키로 했다.
금감원은 영업정지, 대표이사 해임 권고 등 중징계 방침을 사전 통보하며 사실상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도록 숨통을 조였다.
보험사들은 감독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버텼다는 이유로 지난해 5월 최대 9억원의 과징금과 기관경고, 일부 영업정지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당시 삼성생명은 8억9400만원, 교보생명은 4억2800만원, 한화생명은 3억9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다.
즉시연금 미지급액을 둘러싼 논란도 결국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와 비슷하게 막을 내릴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삼성생명이 이사회에서 보험금 일괄 지급 불가 방침을 정할 경우 한화생명, 교보생명도 버티기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각 회사가 법리 검토에 착수한 것은 일괄 지급에 무리가 있다고 보고 금감원에 맞설 논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 때 이미 확인된 대로 상명하복식 감독을 추구하는 금감원과의 법리공방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보험사의 버티기에 체면을 구긴 금감원이 법적 판단과 상관없이 제재 카드로 보험금 지급을 밀어붙이는 시나리오가 재현될 수 있다. 버티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제재의 수위가 높아질 뿐 아니라 제재는 제재대로 받고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내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더욱이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 이후 3명의 원장이 떠나간 금감원에는 소비자 보호를 위해 금융회사와의 전쟁을 선포한 윤석헌 원장이 버티고 있다.
윤 원장은 지난 9일 ‘금융감독 혁신과제’를 발표하면서 “키코(KIKO) 등 과거 발생한 소비자 피해나 암보험, 즉시연금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민원·분쟁 현안의 경우 소비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조정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소비자 보호 쪽으로 감독 역량을 이끌어감으로써 금융사들과의 전쟁을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실제 금감원은 즉시연금 지급과 관련해 현재 시범 운영 중인 일괄구제제도를 통해 소비자를 구제토록 하고, 분조위 결정 취지에 위배되는 부당한 보험금 미지급 사례에 엄정 대응할 방침이다.
생보사들 역시 금감원의 요구는 보험상품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반발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보험금 지급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싣고 있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만기환급형 즉시연금은 상품 자체가 만기보험금 지급 재원 공제를 전제로 만들어진 상품”이라며 “약관에 관련 내용이 명확히 기재돼 있지 않거나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만기환급형 즉시연금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추가로 지급할 경우 오히려 종신형 즉시연금 가입자와의 역차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실제 금감원에서 보험상품이나 약관을 검사하는 직원들에 비해 분조위원들은 보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다 보니 소비자 쪽에 편향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 당시와 마찬가지로 금감원의 피감 대상인 보험사 입장에서는 결국 보험금을 주라면 줄 수밖에 없다”이라고 전했다.
뉴스웨이 장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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