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부산행' 거론되자 말 대신 책으로 답변하버드대 교수 저서···인적 자본 모이는 도시 강조李 "산은은 금융경제 수도에서 아우르는 것이 중요"선거철 반복되는 산은 이전 추진엔 "진보 아닌 퇴보"
그래도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이 마차 앞에 있어야 말을 끌 텐데 마차를 앞에 두고 끌어보라고 하는 격"이라며 "소탐대실"이라고 꼬집었다.
발단은 지난 27일 오후 온라인으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였다. 최근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기업결합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불승인하면서 이날 관심은 이 회장이 구상하는 '플랜B'에 쏠렸다.
쏟아지는 질문에 이 회장은 현대중공업이 EU 결정에 불승인 소송을 진행하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경영컨설팅 결과가 나오면 추후 세부 설명을 하겠다는 취지로 답했다.
1시간 20여분간 이어진 기자간담회 대부분은 이렇게 흘렀다. 세세하게 파고드는 질문이 이어지며 이 회장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라는 말을 하는 횟수도 늘어갔다.
이 회장이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가장 마지막에 나왔다. '최근 나오는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라는 취지의 질문이었다. 준비된 원고가 아니라 평소 자기 생각을 말할 때면 꿈틀대는 이 회장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제가 많은 말은 안 하겠다. 여기 '도시의 승리' 책을 가져왔다. '2050 거주불능 지구' 책도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올려둔 책 2권을 꺼내 올렸다.
"제가 이번 설에 읽어보려고 샀다. 도시의 승리는 사실 2년 전에 읽은 책이다. 거주불능 지구는 기후 변화를 다룬 것인데 가장 중요한 건 기후 변화에서 우리의 행동이 변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도시의 승리는 도시가 왜 중요하고 도시를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래서 제가 몇 년 전에 궁금해서 보기도 했다.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다."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얘기가 나온다는 질문에 '도시의 승리' 책을 꺼내 들며 긴말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다. 2권의 책 중 사실상 하이라이트는 '도시의 승리'였다.
'도시의 승리'는 해냄출판사가 2011년 번역해 펴낸 책이다. 저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다.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글레이저 교수는 1967년 뉴욕의 맨해튼 이스트사이드에서 태어나 40년 가까이 도시에 살며 도시경제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교육, 기술, 아이디어, 인재, 기업가 정신과 같은 인적 자본을 모으는 힘이 도시와 국가의 번영은 물론이고 인간의 행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잘못된 도시 정책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으며 가장 논쟁적인 오피니언 리더로도 분류된다. 실제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서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오며 번영한 도시로서 위상을 높였다"며 "서울은 한국을 아시아, 유럽, 미국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서울의 교통 인프라는 그들 머릿속에 담긴 아이디어가 한국 안팎으로 흐를 수 있게 해준다"고 정의했다.
결국 이동걸 회장이 '도시의 승리'를 답변으로 갈음한 건 금융산업이라는 분야 중에서도 국책은행으로 분류되는 산업은행의 특수성을 봐달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 회장은 '긴말 하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간단히'라는 전제조건을 달아 답변을 이어갔다. 평소 허심탄회한 발언이 강점인 터라 아주 잠깐 말을 멈추긴 했지만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꼈거나 이 말만은 꼭 덧붙여야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는 2년 반 전에 산은의 지방 이전은 진보가 아닌 퇴보라고 말씀드렸다. 금융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타지역 이전 논의는 과거부터 있었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결론이 아니라는 제 입장을 밝혔다. 산업은행은 금융경제를 수도에서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금융지원과 역할 강화 방안에 계속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가깝게는 2021년 서울시장·부산시장 재보궐선거에서 산업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의 지방 이전이 거론됐다. 이때도 정치권에선 산업은행의 새 둥지로 부산을 점찍었다. 그마저도 2020년 총선 때는 산업은행을 원주혁신도시로 보내야 한다는 계획도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국금융산업노조는 국책은행 이전 반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반대 성명을 냈다.
노조는 "국책은행마저 지방으로 이전한다면 각 기관의 경쟁력 상실을 넘어 전체 대한민국 금융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며 "동아시아 금융중심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내적 금융경쟁력을 더 약화시켜 어쩌겠다는 것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이 회장은 '간단히'라는 전제조건을 뒤로하고 작심 발언을 이어갔다.
"산은 이전이 자꾸 거론되는 이유는 산업이나 기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 듯하다. 금융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니까 산은이 간다고 막 돈이 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따져보면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금융이나 산업 생태는 돈만 갖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인프라와 기술과 사업성을 갖춰 나갈 때 금융이 도와줘야 하는데 이런 주객이 전도된 몰이해 때문에 이전 얘기가 나온다. 마차가 앞에 있어야 말을 끌 텐데 마차를 앞에 두고 끌어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지역 정치인들이 특히 그런 주장을 하는데 소탐대실이다."
한국산업은행법엔 '은행의 본점을 서울특별시에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소기업은행법과 한국수출입은행법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먼저다.
최근엔 서병수 국민의힘 이원이 한국산업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대선 후보들도 이를 고쳐 산업은행을 이전하겠다는 계획이다.
최근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부산을 찾아 "부산이 세계 최고의 해양 도시로 또 첨단 도시로 발돋움하려면 금융 자원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한국산업은행법을 개정하고 산업은행을 여의도에서 부산으로 이전시키겠다"고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수도권 공공기관 200여곳을 모두 지방으로 이전하겠다"고 했다. 여기엔 산업은행을 비롯한 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포함된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대부분 업무 연속성을 고려해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은 사금융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과 수도권에 있어야 원활한 소통이 제시간에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주장 가운데는 서울 강남에서 전주로 이전한 국민연금공단 사례가 자주 흘러나온다. 국민연금공단이 매년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겨우겨우 채워도 금방 인력 이탈이 생긴다는 뜻이다.
특히 운용역의 경우 민간보다 처우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들어오는데 그 과정에서 지역 근무 문제까지 겹쳤다는 설명이다.
금융노조 산업은행 지부는 "산업은행은 서울과 수도권의 잉여자금을 회수해 지방에 재분배하고 수도권과 지방 간 금융 격차를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며 "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이전하면 주 수익원으로부터 배제돼 지역 균형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포기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날 이 회장의 작심 발언을 두고 산업은행 임직원들 사이에선 '내심 속 시원했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뉴스웨이 임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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