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는 세계 2차 대전 승전국으로 거듭난 미국의 명성 아래 '세계기축통화'로 약 70년의 명맥을 이어왔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가는 길은 명확했다. 넘어설 수 없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최강국의 칭호와 함께 달러를 기반으로 한 금융최강국으로서의 행보였다. 미국은 세계기축통화인 달러의 발행권을 컨트롤하며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세계 금융을 주도해왔다. 달러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가진 힘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미국이라는 제국의 신뢰를 반영하는 증표, 즉 '보증수표'이기도 했다. 달러의 본질적 가치는 이것이 변함없이 유통될 것이며 무엇인가와 교환되는 가치를 지닐 것이라는 믿음이다.
# '세계기축통화' 달러의 몰락
하지만 지난해 달러의 가치가 급격하게 하락하며 신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여파에 미국과 달러 발행권을 가진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경기 살리기에 나서며 무서운 속도로 달러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2021년 연준이 공개한 대차대조표의 주요 자산은 미국 국채이다. 연준은 무서운 속도로 '찍어낸' 달러로 다양한 곳에서 국채를 매입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대규모 양적완화는 전례가 없는 규모와 속도로 평가되었다. 그 결과 2021년 9월 이미 미국의 부채는 28조 달러에 도달 했으며 GDP 대비 부채비율도 136%로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1946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시점인 119%보다 20% 상승한 수치이다.
미국과 연준이 무서운 속도로 찍어낸 달러는 희소가치를 잃게 된다. 특정자산이 희소성을 잃을 경우 가치를 잃는다는 간단한 논리는 한때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허니버터칩'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여기에 '지구촌' 속 복잡한 거시경제 문제가 더해지며 달러의 가치는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세계의 공장' 중국이 호주와의 무역분쟁 속에 석탄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며 중국 내 생산자 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국의 높은 생산자 물가는 곧 소비자 물가의 상승을 의미했다. 물가 상승과 경기 불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확대되었다.
이런 우려 속에 엎친데 덥친 격으로 올해 3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사회에서 '에너지원'과 '곡물창고' 역할을 수행하던 두 나라의 전쟁이 가지는 특수성은 전세계적 인플레이션에 불을 붙였다. 러시아는 세계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세계의 주요 곡물 생산지이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에 따르면, 전 세계 곡물 수출의 3분의 1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담당해왔다.
두 국가의 전쟁으로 현대 사회 '원자재'로 분류되는 유가와 곡물 가격이 폭등하며 우려하던 인플레이션은 현실이 되었다. 지난 2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보다 7.9% 급등해 40년 만의 최고치를 넘어섰다. 연준이 더 선호하는 물가지표인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도 6.4% 뛰어 연준 목표치를 3배 이상 상회했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케냐의 빵 가격이 40%나 급등했다는 뉴스를 보도하기도 했다. 달러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 경제가 적신호를 보이며 삐걱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라는 말을 재창하던 미 재무부와 연준은 언제그랬냐는 듯이 태도를 바꿨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공격하기 위해 '손도끼(hatchet)'에 손을 댄다"라는 말을 남기며 기준금리를 50bp 올리고 양적 긴축(QT) 발표를 예고했다. 마치 무서운 인플레이션은 의도적이었다는 듯이 행동에 나섰다.
달러의 가치와 동시에 달러의 국제적 신뢰도 균열을 보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던 미국이 러시아 경제 제재를 단행하며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외환보유고 동결을 선언했다.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액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다. 러시아가 보유한 달러를 동결하는 결정은 달러가 지속적으로 유통되고 사용될 수 있다는 신뢰에 균열을 만드는 행위였다. 전세계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 동결을 지켜봤다. 미국을 지탱한 달러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트린 결정을 단행한 것이다.
인플레로 무너지기 시작한 달러의 가치와 신뢰가 러시아의 외환보유고 동결로 더욱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 달러 균열의 틈을 노린 디지털 위안화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이 달러의 균열을 노리고 행동에 나섰다. 3월, 사우디 정부가 중국과의 원유 거래 대금을 달러에서 위안화로 교체하는 사안을 논의 중인 것이 밝혀졌다. 달러는 원유 거래의 유일한 결제 대금으로 '페트로 달러'로 불리우며 힘을 과시해왔다. 하지만 국제사회 속 '신흥강자'로 떠오르며 G2의 위치에 오른 중국은 2016년부터 사우디와의 원유 거래 대금을 위안화로 교체하려는 협상을 지속해온 바 있다. 현재 미국이 사우디의 예맨 내전 개입을 지지하지 않은 것과 이란과의 핵 협상 등 복잡한 이해관계의 틈을 중국이 공략한 것이다. 현재 중국은 사우디가 수출하는 원유의 25% 이상을 구매하고 있는 '큰 손'으로 알려졌다. 이 거래 대금이 위안화로 이뤄질 경우 '페트로 달러'의 공식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오일 결제 대금 교체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과 함께 세상에 디지털 위안화(e-CNY)를 선보였다. 중국 정부 주도 하에 약 11년 간의 개발 연구 기간을 거쳐 2019년 'BSN(Blockchain-based Service Network)' 네트워크 망을 완성한 뒤 해당 네트워크망을 기반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세상에 공개했다. 디지털 위안화는 월 12억 명의 사용자를 가진 '국민 메신저' 위챗(微信, Wechat)에 탑재되며 현재까지 약 136억 달러(한화 약 16조 7573억원)의 거래량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BSN Korea 관계자는 "중국 당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무상으로 빌려주는 등 적극적인 배포를 통해 디지털 위안화의 광범위한 보급과 활용에 힘쓰고 있다"라 말하며 디지털 위안화의 무서운 보급세를 예고했다.
# 결국 자본주의의 본질, 빠른 자본 소비
결국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배하는 지배 계층의 궁극적인 목표는 '빠른 자본의 소비를 통한 자본 순환'이다. 빠른 자본의 순환, 즉 빠른 자본 송금 시스템이 결국 자본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러의 몰락은 달러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스위프트)의 몰락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재편과 새로운 송금 기술의 등장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현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SWIFT의 교체를 부르짖고 있다. 러시아의 SWIFT 배제와 동시에 디지털 위안화를 내세운 BSN의 등장, 그리고 '디지털 금(Digital Gold)'으로 불리는 비트코인(BTC)과 빠른 송금을 표어로 내세운 다양한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은 유심히 살펴봐야 할 요소들이다.
미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로 평가 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달러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새롭게 출현할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새로운 달러 시스템을 만들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한때 달러는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금 1온스에 35달러가 연동된다는 개념으로 금본위제를 택한 바 있다. 미국의 무역적자로 폐지되었지만 '디지털 금'인 비트코인의 출현은 금본위제의 부활을 연상시킬 수 있다. 또한 현재 미국은 작업증명(PoW) 방식인 비트코인 채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비트코인 전면 금지로 많은 중국 소재의 많은 채굴장들이 미국 텍사스주,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지로 이전에 나섰다.
올해 미국 재무부는 러시아 소재 채굴장들에 제재를 가하며 많은 채굴장들이 러시아를 철수해 미국으로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작업증명 방식은 컴퓨팅 파워를 통해 암호화폐를 채굴하고 그에 대한 권한을 갖는 매커니즘이다. 단일 주체가 51% 이상의 해시율(채굴에 사용되는 컴퓨팅 파워)을 차지할 경우 네트워크를 제어할 수 있다. 미국은 텍사스주에 대규모 비트코인 채굴 시설을 유치하며 해시율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비트코인을 통한 새로운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해석을 붙일 수도 있다.
'디지털 금' 비트코인은 한정 수량으로 훌륭한 가치 저장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금의 장점과 동시에 원활한 사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상존한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금본위제를 완성시켜줄 '화폐'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목적인 빠른 송금이 가능한 시스템 말이다.
현재 블록체인 네트워크망 송금의 가장 큰 약점은 잘못된 송금에 한해 송금한 자산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결점이 존재한다. 이를 보완해 오입금에 관해 즉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차지백(Chargeback)' 기술을 채택한 블록체인 네트워크망을 주목해야 한다.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달러와 SWIFT. 세계 금융은 빠르고 편한 송금거래가 가능한 네트워크망 싸움이다.
뉴스웨이 권승원 기자
ksw@newsway.co.kr
저작권자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