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 본더' 특허 분쟁에 '옛 송사' 재조명前직원 경쟁사 이직 제동 건 한미반도체 일각에선 '직업 선택 자유 침해' 지적도
"기밀 유출 가능성"···前직원에게 소송 건 한미반도체
사건은 약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1년 당시 한미반도체는 한화정밀기계 소속 연구원 A 씨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당사자는 한미반도체에서 'TC(열압착) 본더'와 '플립칩 본더' 등 주력 장비 연구개발(R&D) 부서에 몸담았는데, 그런 인물이 경쟁사로 이동했으니 자신들의 핵심 정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회사 측은 주장했다.
'TC 본더'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생산을 위한 필수 장비로, 여기에 쓰이는 D램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칩을 하나씩 열로 압착해 붙이는 역할을 한다.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에 이 기기를 독점으로 납품해왔고, 이를 발판삼아 '세계 1위' 반열에 올랐다. 이 가운데 한화정밀기계가 관련 사업에 힘을 주며 빠르게 추격해오자 손을 쓴 것으로 풀이된다.
3년 뒤인 2024년 4월 수원고등법원으로부터 소송의 두 번째 판결이 나왔다. A 씨가 한화정밀기계에서 한미반도체 기술정보를 사용·공개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게 그 요지다. 피고의 상고 포기에 재판은 그대로 막을 내렸고, 소식이 전해지자 업계에선 한미반도체가 자사 출신 직원에게 '승소'했다는 말들이 오갔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분쟁의 전말이다.
法 "이직엔 문제없어···정보 유출만 신경 써달라"
다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법원이 A 씨에게 비밀 유지를 주문하긴 했으나, 이직 자체에 대해선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전 직장의 기밀을 유출했다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판결을 들여다보면 직원 개인이 한미반도체 재직 중 습득한 기술정보를 다른 곳에 제공해선 안 된다고 선을 그어주는 것에 가깝다.
법조계에 떠도는 소문을 종합하면 당초 한미반도체 측이 제기한 소송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A 씨의 이직을 무효화해달라는 '전직금지 가처분'과 정보 이용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부정경쟁행위금지'에 대한 내용이다. 재판부는 그 중 '전직금지 가처분'을 제외하고 부정경쟁행위금지에 대해서만 받아들였다.
이렇다보니 일각에서는 한미반도체가 다소 민감하게 반응한 게 아니냐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한화정밀기계가 SK하이닉스로 'TC 본더' 납품을 추진하면서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자 애꿎은 직원에게 화살을 돌린 것처럼 비친다는 인식에서다.
게다가 소송이 시작된 2021년은 A 씨가 관련 업계에 뛰어든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사회 초년생과도 같은 사람에게 거대 기업이 영업기밀 유출 가능성을 명분으로 내세워 부담을 짊어지도록 했다는 의미가 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연구원이라 할지라도 경력이 3년 정도에 불과한 만큼 회사 내 중요한 정보를 자세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고위 임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직원이 기밀을 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는 데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한미반도체 측 논리대로 말단 직원인 A씨가 회사의 기밀을 입수했다면, 이는 정보보호 시스템이 부실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직업 선택 자유 침해"···'전직금지 가처분' 향한 우려↑
전직금지 가처분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있다. 그간에는 회사의 경영 노하우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 수단으로 여겨졌다면, 최근엔 헌법에서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란 인식이 자리 잡는 상황이다.
비슷한 판례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이 공유한 뉴스레터를 보면 작년 11월 서울중앙지법은 B기업이 전 임직원 두 명과 C사를 사대로 낸 유인금지·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 건도 한미반도체 사례와 유사하다. B기업은 해당 임직원과 회사 구성원을 경쟁사로 유인하지 않을 것이란 약정을 체결했는데, 이후 두 사람이 경쟁기업 C사로 이직했고, 소속 팀원도 함께 자리를 옮기자 공정거래법 위반과 영업비밀 침해 등을 들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B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직원의 이직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업비밀 침해 행위 역시 소명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임직원이 중요한 정보를 얻었더라도 재직 당시 그에 대한 접근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이를 부정한 수단으로 취득했다고 볼 수 없다고도 판시했다.
업계 관계자는 "결과가 어떻든 '회사 대 직원'의 분쟁은 절대적 약자인 직원에겐 오랜 기간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서 "구체적인 위법 행위가 포착된 게 아니라면 기업으로서도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뉴스웨이 차재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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